Differences in Asian Culture Code and Accept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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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아시아의 혼백관, 혹은 聖의 문제는 그 지역의 지역성과 연계해 전개되어 왔다. 아시아 문화의 구체적 양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 아시아 안의 한국문화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혼백관의 문제는 중요과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자국의 연구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아시아를 시야에 넣은 광역적 연구는 뒤쳐져있다. 그 원인은 혼백관에 대한 인식에 고유신앙론이라는 사상이 깊게 침투해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敬神崇祖’은 아시아 공통된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실제 일본의 경우 1937년 대규모의 교육개혁을 실시하면서 역사교과서가 일제히 개정되었으며, 그 안에 일본이 고대부터 ‘敬神崇祖’의 나라였다고 교육받게 되었다. 전근대 신불분리령 이전의 일본사회에서는 死者의 영혼에 대한 일련의 행위들은 모두 불교에서 담당했었다. 남겨진 가족은 檀越활동을 통해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제하는 영혼(영성) 컨트롤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경신숭조’의 아시아 각국에서 죽은 자의 영혼은 어디로 가면 좋은 것일까.

아시아세계의 신앙습관은 성황신, 토지신이 아시아 전역에 퍼져있으며, 선조신앙이 불교에 들어와 七世父母信仰이 되는 등 각 지역과 관련해 전개되어 왔다. 아시아에서 신앙습관이 일본의 신앙습관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窪德忠씨와 增尾伸一郞씨에 의해 초석이 다져있다. 하지만 이들 연구가 신앙의 고유론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아시아 신앙의 비교라는 시각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와 같은 아시아적 시각 속에서 혼백과 성에 대한 아시아 지역의 실례를 소개해 이에 대한 논의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한다.

2. <참예만다라>의 聖

참예만다라(参詣曼荼羅)는 일본 종교회화의 일종이다. 참예만다라는 1968년 교토국립박물관에서 개최한 <고회도(古繪圖)> 특별전을 계기로 독자적인 종교화로써 취급되기 시작했다. 1968년 이전에는 ‘고회도’, ‘수적미술(垂迹美術)’의 영역 안에 넣거나, 각자 편의에 맞게 혼용해서 사용해 했다. <참예만다라>에 대한 여러 논의들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으며,1) 현재에도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시각의 논의들이 공존하고 있다. 참예만다라를 전부 소개하고 분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만큼, 본고에서는 사이고쿠(西國) 33관음영장과 참예만다라를 연결시켜 논의하겠다.

사이고쿠 33소 관음영장이 처음 성립된 것은 하세데라(長谷寺)의 개산조인 도쿠도 상인(德道上人)에 의해서이다. 718년, 도쿠도 상인이 병에 걸려 가사상태에 빠졌을 때 염라대왕을 만나서 “살아생전에 악업을 지어 지옥에 오는 이들이 많다. 관음영장을 순례해 공덕을 얻을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관음보살의 자비를 전하라”라는 말을 염라대왕으로부터 들었다. 도쿠도상인은 염라대왕을 만났다는 증거로 起請文과 寶印을 가지고 현세로 돌아와 관음영장을 순례하면서 그 증거로 寶印을 찍은 것이 오늘날의 사이고쿠(西國)관음영장 순례의 기원이 되었다. 또 다른 설로는, 10세기경 花山法皇(986󰠏1008)이 처음 관음순례를 시작했다는 설 역시 존재한다.2)

참예만다라 제작과 사이고쿠(西國) 33관음영장과의 연관성을 제기한 이로는 이와하나 미치아키(岩鼻通明)가 있다. 이와하나씨는 참예만다라가 성지의 공간을 위상(位相)정렬한 공간으로 제작되었다고 보았다.3) 이후 후지사와 다카코(藤沢隆子)는 33관음영장을 그린 참예만다라들의 양식과 인물도상이 공통된 부분들이 많다고 지적하는 등 보다 세분화된 연구로 발전되었다.4)

참예만다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聖地라고도 부를 수 있는 영장을 표현하는 부분일 것이다. 영장이 가지는 특징 중 하나로는 불변성을 들 수 있으며, 실제로 현재의 지형과 참예만다라의 구성이 거의 유사한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영장의 불변성은 참예만다라가 제작된 시기뿐 아니라 과거의 모습과 미래의 모습도 함께 그리는 이상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5) 참예만다라의 도상적 구도는 크게 상단부의 靈場(聖地), 중단과 상단에 위치한 전각들(鳥居, 회랑, 緣起와 관련된 곳)을 배치한다. 이들 전각의 역할은 영장관련 법회와 행사 장면들이 함께 그려져 관음성지로서의 영험함을 강조한다. 하단부터 상단까지는 참예길을, 하단에는 참예의 시작인 강이나 바다를 의미하는 물을 배치한다. 이들 도상을 정토신앙과 결부시키자면, 하단 아래의 물은 보타락산 앞의 바다를 상징하는 정토를 의미하며, 일륜과 월륜 뒤의 산은 죽은 영혼이 찾아가는 산속 정토로 보고 있다. 더해서 참예만다라가 33소 관음영장과의 관련성이 대두된 것처럼 대부분의 참예만다라에는 구제의 장면이 등장하는데, 주로 폭포를 배경으로 두 명의 동자가 구제하는 모습이 등장한다.6)

참예만다라 속의 가장 뒤에 있는, 대부분 음영으로 그림자 처리된 곳이 魂과 魄이 머무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다.<그림1> 이곳을 인간이 갈 수 없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고, 이들 혼과 백이 인간의 영역에 올 때의 매개체가 중단과 상단의 각 전각들의 본존불로 보는 것이다. 혼백에 대한 인식은 神으로 취급해 이들이 가을 추수가 끝나고 겨울이 오면 인간의 영역으로 돌아온다고 믿고 있다. 이와 같은 혼백과 신에 대한 인식은 야나기다 구니오를 필두로 한 민속학적 시각에서 형성된 것으로 불교에서도 같은 시각인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개의 문제이다. 이 산속 정토에 머무르는 영혼들이 연고가 있는지, 무연고의 고혼들인지, 어떤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 이곳으로 모이는지에 대한 구체적 연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점에 대해 민속학자들은 이들 영혼을 조상신으로 보는 경향이 크지만, 불교에서는 구체적으로 기술된 사료를 찾기 어렵다. 나아가 참예만다라가 영장들을 그런 것임에도 불고하고 실제로는 핵심인 本地佛과 垂迹佛을 묘사하지 않고 있다. 일반적으로 상단부의 금니를 칠한 원형을 본지불로 본다.

참예만다라에서는 죽은 자의 혼백에 대한 접근이 佛보다는 神이 더 가까운 위치를 차지한다. 대부분의 참예만다라가 상단에 신궁을 위치시키고 중단에 본전을 배치하고 있다. 혼백에 대한 접근법은 이세(伊勢)만다라를 통해 보다 구체화된다. 이세의 高倉山 정상에는 무녀가 사자에 대한 무업을 하는 모습이 묘사되고 있다. 高倉山은 이세에서도 특별한 지역으로 정상에 고분이 있는데, 이 고분을 ‘하늘의 바위문’이라 불러 예로부터 영혼이 모이는 곳으로 보았다. 이곳에서 무녀가 악기 등을 이용해 큰 소리를 내면서 죽은 사자의 영혼을 달래 다른 세계로 보내기 위한 무락이 열리는 모습을 참예만다라가 소개하고 있다.<그림2-3> 참예만다라 속 혼백은 神이 관장하고 살아있는 이들은 기도는 佛이 담당하는 이분법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참예만다라가 관음신앙을 바탕으로 성립된 성지인 만큼, 신불의 공존과 함께 이들을 이분법으로 나누기는 어렵다. 단 신불 사이의 본지-수적 관계는 명확히 구분될 필요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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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나치참예만다라 부분(補陀洛山寺 소장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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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이세만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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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이세만다라

3. 옌뜨산(安子山) 聖地

베트남 불교성지중 한 곳인 옌뜨산(安子山)은 베트남 북동부 Quảng Ninh성과 Bắc Giang성에 걸쳐잇는 옌뜨산맥의 최고봉이다. 옌뜨산 주변 지역은 현재 ‘옌뜨국가삼림’으로 지정되어 자연보호구역에 속한다. 음력 1월 10일부터 3월말까지는 옌뜨산 각 지역에서 다양한 축제가 열리는 순례의 시즌으로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옌뜨산에 불교가 정착된 시기는 베트남 불교의 전성기인 李朝-陳朝에 걸쳐서이다. 옌뜨산 개산조는, 통설에 의하면 󰡔禪苑集英󰡕에 無言通派 제13세 ‘安子山現光禪師’(?-1221)를 개산조로 보고 있지만, 사료상에는 현광이 실제로 옌뜨산에서 활동했는지에 대한 여부가 불분명하다. 이외에 옌뜨산과 관련해 陳朝의 태종(太宗, 1225-1258)이 송의 승려, 天封선사의 가르침을 받고 1236년 옌뜨산으로 향했다. 태종이 다시 궁에 돌아온 후에도 선학을 배우고 궁 안에 資福寺를 건립해 수행의 도장으로 삼았다고 전하고 있다. 옌뜨산이 보다 구체적으로 불교와 관계를 맺은 것은 竹林禪派가 이곳에서 성립되면서부터이다. 1299년, 陳의 仁宗은 퇴위 후 출가해 옌뜨산에 입산했다. 인종을 따르는 승려들이 운집해 인종을 조사로 하는 죽립선파를 세웠다. 종래 중국과 인도를 통해 들어온 선종이 쇠퇴하자, 죽림선파는 기존의 모든 선종들을 흡수 통합해 순수한 베트남인에 의해 세워진 선종의 일파이다. 이 죽림선파는 베트남 불교사에 있어 획기적인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비로소 베트남 선이 성립되었다고 보고 있다.

옌뜨산이 성지로써 선택된 요인에 대해 오니시씨는, ①옌뜨산 남쪽 기슭의 개척이 진행중이었다 ②왕권과 유착해 부패한 불교계의 중심을 도시 중심에서 떨어뜨리기 위해 ③중국 원의 잦은 침략을 받은 陳朝의 입장에서 보면, 옌뜨산 일대는 군사적 요지이기도 했다 ④진왕조 당시 중국 당의 도교가 들어와 크게 성행했다. 진왕조는 옌뜨산 주요 거점지역에 국책의 일환으로 道觀을 설치하고 陳의 인종 자신 역시 불교뿐 아니라 도교에도 크게 의지했다고 지적했다.7) 옌뜨산이 성지화되는 초기에는 불교와 도교의 역할, 인종의 역할이 지배적이었다고 보고 있다. 옌뜨산이 성지로서 일정 시기 쇠퇴기를 갖게 되는데 여기에는 불교적 상황이 크게 좌우되었다. 이왕조와 진왕조 이후 유교가 급부상하면서 불교와 대립하게 된다. 불교는 유교세력과는 상대적으로 점차 중앙의 정치권력과 멀어지는 수순에 접어들었다. 진왕조 말기 이후 정권의 혼란 속에서 사원 파괴가 계속되면서 불교의 존속여부가 불투명해졌지만, 西山朝, 阮朝가 들어서면서 불교가 다시 재건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불교의 재건은 다시 한 번 옌뜨산 불교성지로서의 지위를 되찾게 되었다.

현재 성지로서 옌뜨산 순례 루트는 국도 18호에서 시작해 각 사원을 거슬러 올라가 산 정상에 도착하는 전통적 순례루트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주요 사원만을 참배하고 정상으로 올라가는 2가지 방법이 있다. 옌뜨산 성지순례에는 몇 군데 거점 지역이 있다. 옌뜨죽림선원 지역, 解冤寺·解冤川 지역, 慧光塔園과 花煙寺 지역, 屋根寺(半天寺) 지역, 安期生像과 陳仁宗像, 銅寺로 나눌 수 있다. 옌뜨죽림선원은 옌뜨산 산허리에 위치하며 진의 인종이 입산 후 건립한 사원이라고 전하고 있다. 인종 이후에도 많은 고승들이 머문 곳으로 花煙寺와 함께 옌뜨산 불교의 첫 번째 거점지이다. 解冤寺·解冤川은 산 길 초입에 解冤으로 명명하는 계곡 주변에 세운 사원이다. 인종이 입산하자 후궁들이 쫒아와 입산을 멈추어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인종은 오히려 후궁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다. 후궁들은 자신들의 슬픈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 계곡에 몸을 던졌지만, 인종은 환속하는 일 없이 후궁들의 추선공양을 위해 사원을 건립하고 해원사, 해원천이라 이름 지은 추선공양과 관련 있는 곳이다.

慧光塔園은 인종이 臥雲庵에서 입적하자 다비식을 거행하고 인종의 유골 일부를 묘탑에 봉안한 곳이다. 이곳에는 인종의 능묘를 중심으로 80여기 이상의 묘탑이 건립되었다. 花煙寺는 옌뜨산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사원으로 원래는 雲煙寺, 安子寺라고 불렸다. 이왕조 말기의 現光선사(Hiện Quang, ?-1221)로 모시고 調御聖祖(인종)가 6대조가 되었다. 화연사는 옌뜨산 죽림선원파의 근본도량으로써 성행해 온 곳이다. 屋根寺(半天寺)는 동굴사원으로 용이 승천하는 동굴이라는 의미의 昇龍洞으로 불리기도 한다. 물이 풍부해 예로부터 영험이 있는 곳으로 취급되었고, 인종 역시 이 곳에 離塵庵을 두고 생활을 한 곳이다. 인종 입적 후, 사원을 세워 제기, 12기의 불상, 5기의 석비를 모시고 있다.

安期生像은 중국의 도사 安期生이 단약을 만들기 위해 옌뜨산에 와서 약초를 채취하다가 그대로 화석이 된 상을 가리킨다. 실제 안기생이 옌뜨산에 온 내력 여부는 확인이 불가하다. 銅寺는 산정상에 건립된 작은 당우을 말한다. 後黎朝期(15-18세기)에 건물과 종, 제기까지 모두 구리로 제작한 ‘天竺寺’가 건립되었다. 당우 안에 관음보살상을 안치시켰으나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작은 구조물이었다고 전한다. 1740년 건물이 붕괴된 후 현재의 동사는 20세기에 들어서 재건된 것이다.

4. 결론

아시아 신앙의 구체적 상을 밝히기 위해서는 아시아간의 비교와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언급할 필요도 없다. 지금까지의 아시아론, 아시아비교론은 문화를 현재의 국경을 경계로 묶으면서 고유와 외래라는 축을 세우고 양쪽을 비교해왔다. 하지만 문화란, 스며들고 번지는 글라디에이션 효과로써 문화를 부감할 필요도 있으며, 각 지역의 문화적 전개가 타지역과는 관계없이 발현했다는 아시아 고유성이 아닌, 지역성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본고는 특정문화가 다른 문화보다 우월하다는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닌, 오히려 이문화를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공생하기 위한 인문학적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아시아의 실례를 소개했다.

竹田聽洲씨가 일찍이 ‘불교는 외래로부터 들어온 것이 맞지만, 일본불교는 일본적인 것이고, 일본 고유의 선조신앙을 體現한 것이다’(1950)라고 주장한 것처럼, 아시아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한국 고유의 것’, ‘중국 고유의 것’이라고 고유신앙론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눈을 살짝 옆으로 돌리면 유사한, 거의 동일한 신앙의 행위와 가치관을 확인하는 만큼, 고유신앙론이 여전히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본고에서 소개한 베트남과 일본의 혼과 성(지)에 대한 인식은 시간, 지역을 초월한 아시아 공통의 사고이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본고는 많은 이들이 아시아문화의 기반이 어떻게 형성되고 전개되었는지에 대한 제론이 나오기를 바라며 마치겠다.


Footnotes

[1] 야나기다 구니오(柳田国男)를 필두로 한 민속학자들은 ‘참예’를 ‘마츠리(祭)가 제례(祭禮)로 바뀌는 과정에서 발견된 신앙형태의 하나’로 보고, 신앙적 기대를 위해 먼 곳의 사사를 방문하는 종교적 행위라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가토 구마이치로(加藤熊一郎)를 중심으로 한 민간신앙 부분에서 연구되기 시작했고, 호리 이치로(堀一郎)를 중심으로 역사학적 관점에서 종래의 민간신앙 연구를 체계화 시켰다. 불교민속적 관점에서는 사쿠라이 도쿠타로(桜井徳太郎)가, 역사지리학적 관점에서는 미야다 노보루(宮田登)의 연구논문들이 있다. 미술사에서는 주로 ‘참예만다라’라는 용어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지미령(일본학보, 2017)의 논문에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지미령, 「<참예만다라(參詣曼茶羅)>에 나타난 인물군상 연구―하단의 참예형태를 중심으로―」, 「일본학보」122호, 2017.

[2] 문헌상 기록으로는 園城寺(天台宗)의 승려들의 전기를 모은 「寺門高僧記」 「行尊傳」(12세기)에서 처음 등장한다. 행존(1055~1135, 天台座主44世, 園城寺31世)의 「行尊傳」에는 長谷寺를 1번으로 시작해 三室戶寺를 33번으로 하는 기록과 함께, 33소의 관음영험지를 번호・사찰의 구조・관음종류・발원자 등을 중복기재 했다. 현재의 순례 루르와 유사한 기록은, 覺忠(1118~1177, 園城寺36世)이 쓴 「觀音靈所三十三所巡礼記」(応保元年(1161)正月, 三十三か所を巡礼してこれを記す)에서 찾을 수 있다. 지미령(2017), 각주 18을 축약해서 재인용, p.306.

[3] 岩鼻通明(1996), 「西国靈場の参詣曼荼羅にみる空間表現」, 「本尊巡礼」, 雄山閣出版.

[4] 藤沢隆子(1990), 「三十三所寺院の参詣曼荼羅の位置-図像の分析を通じて」, 浅野清 편 「西国三十三所霊場寺院の総合的研究」, 中央公論美術出版, p.146.

[5] 大高康正(2010), 「参詣曼荼羅の研究」, 岩田書院, p. 39, 48.

[6] 지미령(2017), p. 308.

[7] 大西和彦(2013), 「交州福地安山とベトナム安子山」, 「東方宗教」121호, pp.65-87.


References

1 . 「寺門高僧記」 「行尊傳」, 

2 . グェンラン(1973), 「ベトナム仏教史論1」, Sai Gon, 

3 . 藤沢隆子(1990), 「三十三所寺院の参詣曼荼羅の位置」図像の分析を通じて」, 浅野清 편 「西国三十三所霊場寺院の総合的研究」, 中央公論美術出版, 

4 . 岩鼻通明(1996), 「西国靈場の参詣曼荼羅にみる空間表現」, 「本尊巡礼」, 雄山閣出版., 

5 . 大高康正(2010), 「参詣曼荼羅の研究」, 岩田書院, 

6 . 西村昌也(2011), 「ベトナムの考古・考古学」, 同成社, 

7 . チャンチュウオン(2011), 「安子寺」, Thȏng tin, 

8 . 大西和彦(2013), 「交州福地安山とベトナム安子山」, 「東方宗教」121호, 

9 . チャンチュウオン(2015), 「安子の名士」, Dȃn tộc, 

10 . 지미령, 「<참예만다라(參詣曼茶羅)>에 나타난 인물군상 연구―하단의 참예형태를 중심으로―」, 「일본학보」122호, 2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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