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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fferences in Asian Culture Code and Acceptance

Differences in Asian Culture Code and Acceptance








1. 서론

아시아의 혼백관, 혹은 聖의 문제는 그 지역의 지역성과 연계해 전개되어 왔다. 아시아 문화의 구체적 양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 아시아 안의 한국문화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혼백관의 문제는 중요과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자국의 연구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아시아를 시야에 넣은 광역적 연구는 뒤쳐져있다. 그 원인은 혼백관에 대한 인식에 고유신앙론이라는 사상이 깊게 침투해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敬神崇祖’은 아시아 공통된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실제 일본의 경우 1937년 대규모의 교육개혁을 실시하면서 역사교과서가 일제히 개정되었으며, 그 안에 일본이 고대부터 ‘敬神崇祖’의 나라였다고 교육받게 되었다. 전근대 신불분리령 이전의 일본사회에서는 死者의 영혼에 대한 일련의 행위들은 모두 불교에서 담당했었다. 남겨진 가족은 檀越활동을 통해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제하는 영혼(영성) 컨트롤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경신숭조’의 아시아 각국에서 죽은 자의 영혼은 어디로 가면 좋은 것일까.

아시아세계의 신앙습관은 성황신, 토지신이 아시아 전역에 퍼져있으며, 선조신앙이 불교에 들어와 七世父母信仰이 되는 등 각 지역과 관련해 전개되어 왔다. 아시아에서 신앙습관이 일본의 신앙습관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窪德忠씨와 增尾伸一郞씨에 의해 초석이 다져있다. 하지만 이들 연구가 신앙의 고유론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아시아 신앙의 비교라는 시각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와 같은 아시아적 시각 속에서 혼백과 성에 대한 아시아 지역의 실례를 소개해 이에 대한 논의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한다.

2. <참예만다라>의 聖

참예만다라(参詣曼荼羅)는 일본 종교회화의 일종이다. 참예만다라는 1968년 교토국립박물관에서 개최한 <고회도(古繪圖)> 특별전을 계기로 독자적인 종교화로써 취급되기 시작했다. 1968년 이전에는 ‘고회도’, ‘수적미술(垂迹美術)’의 영역 안에 넣거나, 각자 편의에 맞게 혼용해서 사용해 했다. <참예만다라>에 대한 여러 논의들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으며,1) 현재에도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시각의 논의들이 공존하고 있다. 참예만다라를 전부 소개하고 분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만큼, 본고에서는 사이고쿠(西國) 33관음영장과 참예만다라를 연결시켜 논의하겠다.

사이고쿠 33소 관음영장이 처음 성립된 것은 하세데라(長谷寺)의 개산조인 도쿠도 상인(德道上人)에 의해서이다. 718년, 도쿠도 상인이 병에 걸려 가사상태에 빠졌을 때 염라대왕을 만나서 “살아생전에 악업을 지어 지옥에 오는 이들이 많다. 관음영장을 순례해 공덕을 얻을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관음보살의 자비를 전하라”라는 말을 염라대왕으로부터 들었다. 도쿠도상인은 염라대왕을 만났다는 증거로 起請文과 寶印을 가지고 현세로 돌아와 관음영장을 순례하면서 그 증거로 寶印을 찍은 것이 오늘날의 사이고쿠(西國)관음영장 순례의 기원이 되었다. 또 다른 설로는, 10세기경 花山法皇(986󰠏1008)이 처음 관음순례를 시작했다는 설 역시 존재한다.2)

참예만다라 제작과 사이고쿠(西國) 33관음영장과의 연관성을 제기한 이로는 이와하나 미치아키(岩鼻通明)가 있다. 이와하나씨는 참예만다라가 성지의 공간을 위상(位相)정렬한 공간으로 제작되었다고 보았다.3) 이후 후지사와 다카코(藤沢隆子)는 33관음영장을 그린 참예만다라들의 양식과 인물도상이 공통된 부분들이 많다고 지적하는 등 보다 세분화된 연구로 발전되었다.4)

참예만다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聖地라고도 부를 수 있는 영장을 표현하는 부분일 것이다. 영장이 가지는 특징 중 하나로는 불변성을 들 수 있으며, 실제로 현재의 지형과 참예만다라의 구성이 거의 유사한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영장의 불변성은 참예만다라가 제작된 시기뿐 아니라 과거의 모습과 미래의 모습도 함께 그리는 이상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5) 참예만다라의 도상적 구도는 크게 상단부의 靈場(聖地), 중단과 상단에 위치한 전각들(鳥居, 회랑, 緣起와 관련된 곳)을 배치한다. 이들 전각의 역할은 영장관련 법회와 행사 장면들이 함께 그려져 관음성지로서의 영험함을 강조한다. 하단부터 상단까지는 참예길을, 하단에는 참예의 시작인 강이나 바다를 의미하는 물을 배치한다. 이들 도상을 정토신앙과 결부시키자면, 하단 아래의 물은 보타락산 앞의 바다를 상징하는 정토를 의미하며, 일륜과 월륜 뒤의 산은 죽은 영혼이 찾아가는 산속 정토로 보고 있다. 더해서 참예만다라가 33소 관음영장과의 관련성이 대두된 것처럼 대부분의 참예만다라에는 구제의 장면이 등장하는데, 주로 폭포를 배경으로 두 명의 동자가 구제하는 모습이 등장한다.6)

참예만다라 속의 가장 뒤에 있는, 대부분 음영으로 그림자 처리된 곳이 魂과 魄이 머무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다.<그림1> 이곳을 인간이 갈 수 없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고, 이들 혼과 백이 인간의 영역에 올 때의 매개체가 중단과 상단의 각 전각들의 본존불로 보는 것이다. 혼백에 대한 인식은 神으로 취급해 이들이 가을 추수가 끝나고 겨울이 오면 인간의 영역으로 돌아온다고 믿고 있다. 이와 같은 혼백과 신에 대한 인식은 야나기다 구니오를 필두로 한 민속학적 시각에서 형성된 것으로 불교에서도 같은 시각인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개의 문제이다. 이 산속 정토에 머무르는 영혼들이 연고가 있는지, 무연고의 고혼들인지, 어떤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 이곳으로 모이는지에 대한 구체적 연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점에 대해 민속학자들은 이들 영혼을 조상신으로 보는 경향이 크지만, 불교에서는 구체적으로 기술된 사료를 찾기 어렵다. 나아가 참예만다라가 영장들을 그런 것임에도 불고하고 실제로는 핵심인 本地佛과 垂迹佛을 묘사하지 않고 있다. 일반적으로 상단부의 금니를 칠한 원형을 본지불로 본다.

참예만다라에서는 죽은 자의 혼백에 대한 접근이 佛보다는 神이 더 가까운 위치를 차지한다. 대부분의 참예만다라가 상단에 신궁을 위치시키고 중단에 본전을 배치하고 있다. 혼백에 대한 접근법은 이세(伊勢)만다라를 통해 보다 구체화된다. 이세의 高倉山 정상에는 무녀가 사자에 대한 무업을 하는 모습이 묘사되고 있다. 高倉山은 이세에서도 특별한 지역으로 정상에 고분이 있는데, 이 고분을 ‘하늘의 바위문’이라 불러 예로부터 영혼이 모이는 곳으로 보았다. 이곳에서 무녀가 악기 등을 이용해 큰 소리를 내면서 죽은 사자의 영혼을 달래 다른 세계로 보내기 위한 무락이 열리는 모습을 참예만다라가 소개하고 있다.<그림2-3> 참예만다라 속 혼백은 神이 관장하고 살아있는 이들은 기도는 佛이 담당하는 이분법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참예만다라가 관음신앙을 바탕으로 성립된 성지인 만큼, 신불의 공존과 함께 이들을 이분법으로 나누기는 어렵다. 단 신불 사이의 본지-수적 관계는 명확히 구분될 필요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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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나치참예만다라 부분(補陀洛山寺 소장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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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이세만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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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이세만다라

3. 옌뜨산(安子山) 聖地

베트남 불교성지중 한 곳인 옌뜨산(安子山)은 베트남 북동부 Quảng Ninh성과 Bắc Giang성에 걸쳐잇는 옌뜨산맥의 최고봉이다. 옌뜨산 주변 지역은 현재 ‘옌뜨국가삼림’으로 지정되어 자연보호구역에 속한다. 음력 1월 10일부터 3월말까지는 옌뜨산 각 지역에서 다양한 축제가 열리는 순례의 시즌으로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옌뜨산에 불교가 정착된 시기는 베트남 불교의 전성기인 李朝-陳朝에 걸쳐서이다. 옌뜨산 개산조는, 통설에 의하면 󰡔禪苑集英󰡕에 無言通派 제13세 ‘安子山現光禪師’(?-1221)를 개산조로 보고 있지만, 사료상에는 현광이 실제로 옌뜨산에서 활동했는지에 대한 여부가 불분명하다. 이외에 옌뜨산과 관련해 陳朝의 태종(太宗, 1225-1258)이 송의 승려, 天封선사의 가르침을 받고 1236년 옌뜨산으로 향했다. 태종이 다시 궁에 돌아온 후에도 선학을 배우고 궁 안에 資福寺를 건립해 수행의 도장으로 삼았다고 전하고 있다. 옌뜨산이 보다 구체적으로 불교와 관계를 맺은 것은 竹林禪派가 이곳에서 성립되면서부터이다. 1299년, 陳의 仁宗은 퇴위 후 출가해 옌뜨산에 입산했다. 인종을 따르는 승려들이 운집해 인종을 조사로 하는 죽립선파를 세웠다. 종래 중국과 인도를 통해 들어온 선종이 쇠퇴하자, 죽림선파는 기존의 모든 선종들을 흡수 통합해 순수한 베트남인에 의해 세워진 선종의 일파이다. 이 죽림선파는 베트남 불교사에 있어 획기적인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비로소 베트남 선이 성립되었다고 보고 있다.

옌뜨산이 성지로써 선택된 요인에 대해 오니시씨는, ①옌뜨산 남쪽 기슭의 개척이 진행중이었다 ②왕권과 유착해 부패한 불교계의 중심을 도시 중심에서 떨어뜨리기 위해 ③중국 원의 잦은 침략을 받은 陳朝의 입장에서 보면, 옌뜨산 일대는 군사적 요지이기도 했다 ④진왕조 당시 중국 당의 도교가 들어와 크게 성행했다. 진왕조는 옌뜨산 주요 거점지역에 국책의 일환으로 道觀을 설치하고 陳의 인종 자신 역시 불교뿐 아니라 도교에도 크게 의지했다고 지적했다.7) 옌뜨산이 성지화되는 초기에는 불교와 도교의 역할, 인종의 역할이 지배적이었다고 보고 있다. 옌뜨산이 성지로서 일정 시기 쇠퇴기를 갖게 되는데 여기에는 불교적 상황이 크게 좌우되었다. 이왕조와 진왕조 이후 유교가 급부상하면서 불교와 대립하게 된다. 불교는 유교세력과는 상대적으로 점차 중앙의 정치권력과 멀어지는 수순에 접어들었다. 진왕조 말기 이후 정권의 혼란 속에서 사원 파괴가 계속되면서 불교의 존속여부가 불투명해졌지만, 西山朝, 阮朝가 들어서면서 불교가 다시 재건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불교의 재건은 다시 한 번 옌뜨산 불교성지로서의 지위를 되찾게 되었다.

현재 성지로서 옌뜨산 순례 루트는 국도 18호에서 시작해 각 사원을 거슬러 올라가 산 정상에 도착하는 전통적 순례루트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주요 사원만을 참배하고 정상으로 올라가는 2가지 방법이 있다. 옌뜨산 성지순례에는 몇 군데 거점 지역이 있다. 옌뜨죽림선원 지역, 解冤寺·解冤川 지역, 慧光塔園과 花煙寺 지역, 屋根寺(半天寺) 지역, 安期生像과 陳仁宗像, 銅寺로 나눌 수 있다. 옌뜨죽림선원은 옌뜨산 산허리에 위치하며 진의 인종이 입산 후 건립한 사원이라고 전하고 있다. 인종 이후에도 많은 고승들이 머문 곳으로 花煙寺와 함께 옌뜨산 불교의 첫 번째 거점지이다. 解冤寺·解冤川은 산 길 초입에 解冤으로 명명하는 계곡 주변에 세운 사원이다. 인종이 입산하자 후궁들이 쫒아와 입산을 멈추어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인종은 오히려 후궁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다. 후궁들은 자신들의 슬픈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 계곡에 몸을 던졌지만, 인종은 환속하는 일 없이 후궁들의 추선공양을 위해 사원을 건립하고 해원사, 해원천이라 이름 지은 추선공양과 관련 있는 곳이다.

慧光塔園은 인종이 臥雲庵에서 입적하자 다비식을 거행하고 인종의 유골 일부를 묘탑에 봉안한 곳이다. 이곳에는 인종의 능묘를 중심으로 80여기 이상의 묘탑이 건립되었다. 花煙寺는 옌뜨산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사원으로 원래는 雲煙寺, 安子寺라고 불렸다. 이왕조 말기의 現光선사(Hiện Quang, ?-1221)로 모시고 調御聖祖(인종)가 6대조가 되었다. 화연사는 옌뜨산 죽림선원파의 근본도량으로써 성행해 온 곳이다. 屋根寺(半天寺)는 동굴사원으로 용이 승천하는 동굴이라는 의미의 昇龍洞으로 불리기도 한다. 물이 풍부해 예로부터 영험이 있는 곳으로 취급되었고, 인종 역시 이 곳에 離塵庵을 두고 생활을 한 곳이다. 인종 입적 후, 사원을 세워 제기, 12기의 불상, 5기의 석비를 모시고 있다.

安期生像은 중국의 도사 安期生이 단약을 만들기 위해 옌뜨산에 와서 약초를 채취하다가 그대로 화석이 된 상을 가리킨다. 실제 안기생이 옌뜨산에 온 내력 여부는 확인이 불가하다. 銅寺는 산정상에 건립된 작은 당우을 말한다. 後黎朝期(15-18세기)에 건물과 종, 제기까지 모두 구리로 제작한 ‘天竺寺’가 건립되었다. 당우 안에 관음보살상을 안치시켰으나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작은 구조물이었다고 전한다. 1740년 건물이 붕괴된 후 현재의 동사는 20세기에 들어서 재건된 것이다.

4. 결론

아시아 신앙의 구체적 상을 밝히기 위해서는 아시아간의 비교와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언급할 필요도 없다. 지금까지의 아시아론, 아시아비교론은 문화를 현재의 국경을 경계로 묶으면서 고유와 외래라는 축을 세우고 양쪽을 비교해왔다. 하지만 문화란, 스며들고 번지는 글라디에이션 효과로써 문화를 부감할 필요도 있으며, 각 지역의 문화적 전개가 타지역과는 관계없이 발현했다는 아시아 고유성이 아닌, 지역성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본고는 특정문화가 다른 문화보다 우월하다는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닌, 오히려 이문화를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공생하기 위한 인문학적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아시아의 실례를 소개했다.

竹田聽洲씨가 일찍이 ‘불교는 외래로부터 들어온 것이 맞지만, 일본불교는 일본적인 것이고, 일본 고유의 선조신앙을 體現한 것이다’(1950)라고 주장한 것처럼, 아시아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한국 고유의 것’, ‘중국 고유의 것’이라고 고유신앙론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눈을 살짝 옆으로 돌리면 유사한, 거의 동일한 신앙의 행위와 가치관을 확인하는 만큼, 고유신앙론이 여전히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본고에서 소개한 베트남과 일본의 혼과 성(지)에 대한 인식은 시간, 지역을 초월한 아시아 공통의 사고이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본고는 많은 이들이 아시아문화의 기반이 어떻게 형성되고 전개되었는지에 대한 제론이 나오기를 바라며 마치겠다.


Footnotes

[1] 야나기다 구니오(柳田国男)를 필두로 한 민속학자들은 ‘참예’를 ‘마츠리(祭)가 제례(祭禮)로 바뀌는 과정에서 발견된 신앙형태의 하나’로 보고, 신앙적 기대를 위해 먼 곳의 사사를 방문하는 종교적 행위라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가토 구마이치로(加藤熊一郎)를 중심으로 한 민간신앙 부분에서 연구되기 시작했고, 호리 이치로(堀一郎)를 중심으로 역사학적 관점에서 종래의 민간신앙 연구를 체계화 시켰다. 불교민속적 관점에서는 사쿠라이 도쿠타로(桜井徳太郎)가, 역사지리학적 관점에서는 미야다 노보루(宮田登)의 연구논문들이 있다. 미술사에서는 주로 ‘참예만다라’라는 용어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지미령(일본학보, 2017)의 논문에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지미령, 「<참예만다라(參詣曼茶羅)>에 나타난 인물군상 연구―하단의 참예형태를 중심으로―」, 「일본학보」122호, 2017.

[2] 문헌상 기록으로는 園城寺(天台宗)의 승려들의 전기를 모은 「寺門高僧記」 「行尊傳」(12세기)에서 처음 등장한다. 행존(1055~1135, 天台座主44世, 園城寺31世)의 「行尊傳」에는 長谷寺를 1번으로 시작해 三室戶寺를 33번으로 하는 기록과 함께, 33소의 관음영험지를 번호・사찰의 구조・관음종류・발원자 등을 중복기재 했다. 현재의 순례 루르와 유사한 기록은, 覺忠(1118~1177, 園城寺36世)이 쓴 「觀音靈所三十三所巡礼記」(応保元年(1161)正月, 三十三か所を巡礼してこれを記す)에서 찾을 수 있다. 지미령(2017), 각주 18을 축약해서 재인용, p.306.

[3] 岩鼻通明(1996), 「西国靈場の参詣曼荼羅にみる空間表現」, 「本尊巡礼」, 雄山閣出版.

[4] 藤沢隆子(1990), 「三十三所寺院の参詣曼荼羅の位置-図像の分析を通じて」, 浅野清 편 「西国三十三所霊場寺院の総合的研究」, 中央公論美術出版, p.146.

[5] 大高康正(2010), 「参詣曼荼羅の研究」, 岩田書院, p. 39, 48.

[6] 지미령(2017), p. 308.

[7] 大西和彦(2013), 「交州福地安山とベトナム安子山」, 「東方宗教」121호, pp.65-87.


References

1 . 「寺門高僧記」 「行尊傳」, 

2 . グェンラン(1973), 「ベトナム仏教史論1」, Sai Gon, 

3 . 藤沢隆子(1990), 「三十三所寺院の参詣曼荼羅の位置」図像の分析を通じて」, 浅野清 편 「西国三十三所霊場寺院の総合的研究」, 中央公論美術出版, 

4 . 岩鼻通明(1996), 「西国靈場の参詣曼荼羅にみる空間表現」, 「本尊巡礼」, 雄山閣出版., 

5 . 大高康正(2010), 「参詣曼荼羅の研究」, 岩田書院, 

6 . 西村昌也(2011), 「ベトナムの考古・考古学」, 同成社, 

7 . チャンチュウオン(2011), 「安子寺」, Thȏng tin, 

8 . 大西和彦(2013), 「交州福地安山とベトナム安子山」, 「東方宗教」121호, 

9 . チャンチュウオン(2015), 「安子の名士」, Dȃn tộc, 

10 . 지미령, 「<참예만다라(參詣曼茶羅)>에 나타난 인물군상 연구―하단의 참예형태를 중심으로―」, 「일본학보」122호, 2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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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acteristics of East Asian Traditional Arts Culture in the Early 20th Century;Focused on Kwon-Bun in Korea and Japan

Characteristics of East Asian Traditional Arts Culture in the Early 20th Century;Focused on Kwon-Bun in Korea and Japan








1.들어가면서

한국의 20세기초기의 기생과 권번에 대한 연구는 많은 분야에서 폭넓게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20세기초기의 권번에 대한 연구는 한국권번이 식민지화에 의해 일본권번을 모델로 설립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논을 서술하고 있지만, 일본의 자료에 의거한 문헌조사를 통한 연구 및 비교연구에 대해서는 전무하다.

따라서 본 본고의 목적은 20세기 초 한국의 권번의 실체와 특징을 밝히는 것이다. 권번은 일본 에도시대 (江戸時代)1779년에 요시와라 유곽(吉原遊郭)에서 만들어진 제도로 식민지를 통해 조선사회에 도입된 제도이다. 따라서 20세기 초기의 한국의 권번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권번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선행연구를 검토하여 양국의 문헌자료 검토와 기생과 게이샤에 관련한 단속 법령과 당시의 신문과 잡지 그리고 기생과 자서전(自伝)과 인터뷰 자료 등을 이용하여 비교연구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20세기 이전 한국의 기생은 신분은 천민이지만 관에 소속되어 여악(女楽)을 담당하며 궁중무용을 전승하는 주체자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20세기 초 한국의 기생은 일본 식민지화와 근대화를 통해 새로운 환경에 일본의 법령과 권번이라는 제도 아래에서 게이샤와 동일한 역할과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기생과 게이샤의 시초의 성격과 역할이 달랐으므로 양국의 하나마치(花街) 시스템의 운영은 차이를 보였다. 20세기 초 한국의 권번만이 기생 교육 기관으로서의 기생 교육을 담당하는 역할의 특징을 보였다. 식민지조선의 권번은 궁중의 가무악(歌舞楽)과 민간예능이 권번이라는 기관 한 곳에 모임으로써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도 한국의 전통예능을 보존할 수 있었고 오늘날까지 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권번과 한국권번에 대해서 설명하기 앞서 일본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화류계를 형성하는 영업지의 역사가 각기 다르며, 게이샤와 권번을 칭하는 이름도 조금씩 다르다는 점을 밝인다. 일본의 권번은 동일한 발음으로 한자가 다르나 券番、検番、見番 원고에서는 券番 으로 통일하겠다.

2.일본의 권번

2.1. 에도시대 권번

일본의 권번은 문헌자료에 의하면 에도시대의 요시와라 유곽에서 시작되었다. 요시와라 권번의 설립 및 역할에 대해서는 『 江戸花街沿革誌(下)』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에도시대 요시와라는 일본정부가 허가한 유곽으로 민간에서 운영하였다. 요시와라 유곽에서의 게이샤는 연회 공간에서 유녀가 춤과 노래를 부를 때 샤미센으로 흥을 돋우는 보조자 역할로 샤미센 연주자로서 남자게이샤와 여자게이샤가 존재하였다. 요시와라 유곽의 여자게이샤의 증가와 함께 요시와라 유곽에서 한 연회 공간에 여자게이샤와 유녀가 있으므로 그 사이에 문제들이 많이 발생하였고 그 단속을 필요로 했다. 유곽에서는 유녀 본래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유녀업에 방해가 되는 것은 업자들도 허용하지 않았다. 여자 기생의 매음과 일반의 풍기가 문란해질 것을 방지하기 때문에 1779년 권번을 설치했다. 권번에서는 권번소규약 「見番所規約」 을 만들어 엄격하게 단속했다.

이때 권번의 역할은 요시와라 유곽 연회공간에서 흥을 돋구는 유녀는 물론 샤미센 연주자로서의 남녀 게이샤와 죠루리와 같은 전문예인까지 권번에 등록하게 하고 관리 감독하였다. 그리고 정부에 세금징수의 사무 등의 일체의 사무를 처리하는 역할과 요시와라 유곽 내에서의 전반적인 역할 그리고 게이샤의 질병이나 곤란에 처해 있을 경우 등을 서포트 역할을 했다.

권번소규약의 내용을 보면, 권번 설립 이전에는 게이샤의 대문 통행이 자유로웠지만, 게이샤의 풍기 문란의 원인으로권번 설립과 함께 자유가 통제되었다. 어떠한 사정이 있어도 하루 두 사람 외에는 대문을 나서는 것을 금지했으며 단, 명절에만 외출을 허락하였다. 외출 시에는 미리 권번에 신고해야 했으며 오후 네시까지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게이샤의 분장이 화려하지 않게 흰색 칼라 무지의 가문을 넣은 기모노에 수놓은 무늬를 금지하고, 머리 장식도 비녀 한 개만 허락하였다. 유녀가 손님과 게이샤의 관계가 수상하다고 생각하면 즉시 권번에 호소하고 권번은 그 게이샤를 불러서 엄하게 훈계하고 사정에 따라서는 하루에서 사흘간 영업 정지를 명령했다. 그리고 권번은 게이샤 세 명이 한 조를 이루어 연회석에 참석하게 하였다. 그 이유는 게이샤가 혼자 손님을 대하지 못하도록 풍기를 바로잡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영업시간은 낮 12시부터 밤 10시까지 하고, 게이샤의 화대(유곽의 연회에서 종사한 돈)는 권번이 관리하고 있으며 권번이 게이샤의 화대 중 절반을 가져가고 게이샤와 찻집에 분배했다.

권번은 게이샤의 화대에서 절반을 가져가 주요 수익이 됐다. 권번이 가져간 돈은 연중 행사의 보조금과 유곽내의 공사로 인한 지출 이외에는 모두 권번의 이사에게 수익이 돌아갔다.

이와 같이 게이샤의 행동이나 의상에 대한 제한은 모두 유녀의 영업을 고려한 것이다. 이는 유곽의 연회의 중심 인물은 유녀이고 게이샤는 샤미센으로 연회장의 흥을 돋구는 보조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에도 시대에는 유녀와 기생은 의상에 의해서 구별되고 있었다. 게이샤가 유녀의 직분을 침범하지 못하게 그 복장까지 권번에 의해서 통제되었던 것이다. 또한 게이샤가 손님 옆자리에 앉는 것을 금지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에도 시대의 요시와라 유곽의 게이샤는 손님을 접대하는 역할이 아닌 샤미센 연주자로서의 전문예인이었다. 그리고 게이샤의 영업허가는 권번이 주체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권번의 설립 목적은 첫째, 유녀영업을 보호하기 위한 게이샤를 관리하는 일이었다. 주로 여자 게이샤가 유녀의 유객을 박탈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이 권번제도는 에도시대의 화류계의 조직과 화류계 종사하는 여성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기반을 만든 제도였다. 이것은 메이지시대 이후로 유녀를 배제하고 게이샤가 중심이 되는 화류계가 형성될 때까지 이어졌다. 메이지시대 이후는 유녀와 기생이 나뉘어 게이샤를 중심으로 한 화류계가 형성되었다.

2.2. 메이지시대 권번

2.2.1. 하나마치(花街)의 조직과 역할

메이지시대(1868년) 가 시작되면서 정계 재계의 사교장으로 도쿄에 게이샤 하나마치가 형성되었다. 메이지3년(1870년)에 교토에도 게이샤 하나마치가 허용되었다.

메이지5년(1872년)11월 2일 메이지 정부가 게이샤와 유녀의 인신 매매의 규제 등의 목적으로 인신 매매를 금지하였다. 이와 같은 해방령「人身売買ヲ禁シ諸奉公人年限ヲ定メ芸娼妓ヲ開放シ之ニ付テノ貸借訴訟ハ取上ケスノ件」에 의해서 고용살이가 금지되었으며, 고용계약 기간은 7년까지로 제한되고 양쪽(포주 집과 게이샤와 유녀)이 합의할 때만 계약이 갱신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게이샤와 유녀와 같은 모든 화류계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경찰서에 등록하고 허가를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 사회에 표면적으로는 유녀는 뒤로 밀려나고 점점 유녀의 자리와 수는 줄어들고, 게이샤의 하나마치는 굳게 자리를 잡아갔다.

그리고 메이지 4년(1871년)에 외국인 관광객을 모으겠다는 의도로 교토 최초의 전시회인 교토 박람회가 열렸다. 그것은 메이지 천황의 도쿄 천도에 의해서 천년 동안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가 침체하고 다시 도시를 활성화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박람회를 더욱 화려한 것으로 하기 때문에 교토 박람회의 여흥으로 기온 코부와 함께 폰토초 공연이 이어졌다. 주요 인기 있는 공연으로 교토시의 유명한 유흥가 중 세 곳에서 게이샤 공연이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도, 기온의 "미야코 오도리"는 유명했다. 폰토초는 "가모가와 오도리"을 선 보였다. 이것이 메이지 게이샤의 에도시대와는 다른 공적으로 예능인으로서 교토를 북돋는 새로운 역할의 시작이다. 이후 국내외의 대소의 많은 박람회와 공진회에 게이샤가 참석하며 전통예능을 선보임으로써 일본의 대표하는 여성 예능인으로서의 게이샤의 이미지가 자리잡게 된다.

에도 시대 이후의 게이샤를 시대에 따라 일반적으로 메이지 게이샤, 다이쇼 게이샤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본고에서는 메이지시대 이후의 게이샤를 근대 게이샤라고 칭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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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메이지시대 하나마치 구조

일반적으로 일본의 하나마치는 권번이 총괄하고 삼업(三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삼업 안에는 오키야, 요정, 마치아이(=오차야)로 구성되어있다.

오키야는 게이샤가 되기위해 소녀들이 고용계약을 맺고 미나라이(견습생)으로 오키야에 들어가 오카상(오키야의 업주)이라고 불리는 사람 밑에서 오카상과 오네상(선배 게이샤)의 보조 역할을 하며, 게이샤가 되기 위한 예능교육과 기본예절교육 등을 받는 곳을 말한다. 이 때 필요한 모든 생활비와 게이샤가 되기 위한 교육비는 오카상으로부터 지원받게 된다. 게이샤가 되어 수입이 생기면 처음 고용계약 때 진 빚과 게이샤가 되기위한 생활비 교육비 등을 갚아나간다.

요정과 마치아이와 오차야은 게이샤의 파견장소라고 말할 수 있다. 손님은 이 곳을 통하지 않으면 게이샤를 연회석에 부를 수 없는 시스템이다. 손님은 요정과 마치아이 그리고 오차야와 같은 파견장소에서만 게이샤를 부를 수 있고, 파견장소에서 권번을 통하여 오키야에 연락을 취해 게이샤가 파견장소로 가는 삼업조합 시스템으로 운영됐다. 이 때 삼업조합을 총괄하여 관리하고 전반적인 사무 업무의 일체를 담당했던 곳이 권번이다. 권번의 역할은 게이샤의 하나다이를 집계하는 업무이고 일본정부에 내는 세금의 징수 업무를 했다. 그리고 게이샤가 영업을 하기 위해서는 경찰서에 영업신고가 필요했고 그만둘 때는 폐업신고가 필요했는데 권번이 이를 대신하였다. 그리고 권번이 주최가 되어 삼업조합의 경영이 원활하게 운영될 수있도록 각종 행사와 공연의 준비와 기획을 담당하는 역할을 하였다.

3.한국의 권번

3.1. 권번의 조직도

한국의 20세기 초기의 일본 식민지에 의해 도입된 한국의 권번 조직도는 기생출신의 인터뷰와 기생 자서전을 근거로 아래와 같이 작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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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한국의 권번 조직도

한국의 권번은 위의 조직도와 같이 대표자를 중심으로 총무부문과 교육부문으로 구성되어 있고, 동기로서 권번에 입학하여 졸업하기까지의 교육과 졸업 후에 기생이 요정에 나가 기업을 하기까지 그리고 기생으로서 기업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관리하는 시스템으로 체계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권번의 대표자가 총괄하고, 교육 부문과 총무 부문으로 나뉘는데, 각각의 역할이 명확했다. 동기로서 권번에 입학하면 통학을 원칙으로 매일 권번을 다녔다. 권번의 교육 과정을 이수해 졸업 시험에 통과하면 권번 기생으로 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

대표자는 권번의 설립에 있어서는 신분에 관계 없이 출자할 수 있는 주식 회사 형태로 되어 있었다. 권번이 주식 회사 형태로 된 것은 새로운 환경의 근대 자본주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총독부가 발간한 『관보』을 통해서도, 권번이 주식 회사임을 확인할 수 있는 문헌자료로서 임원들을 소개하고 있다. 식민지조선 권번은 당시 일제의 통치 아래 있던 반면 주식 회사로 전환 등을 통해서 자치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2. 권번의 역할

3.2.1. 경찰서에 기생인가증과 수속 업무

1908년에 경시총감부의 기록인 『기생과 창기에 관한 서류철』의 법령 속에서 1908년에 발포된 경시청령 5호의 기생단속령이 있다. 그 법령에 의해서 식민지 조선의 기생은 기업을 하기 위해서 인가증이 필요했다. 그 수속 업무를 권번이 기생들 대신하였다. 권번의 역할은 기생들의 전반적인 업무를 실시하고 있었다. 여기에 기생 단속령의 일부분의 원문을 소개한다.

第一条 妓生ノ稼業を為サントスル者ハ父母又ハ之ニ代ルヘキ親族ノ連署シタル書面ヲ以ッテ所轄警察官署ヲ経テ警視庁ニ届出テ認可証を受クへシ

稼業を廃止シタルトキハ認可証ヲ警視庁二返納スへシ

第四条 第一条ノ認可証ヲ受ケスシテ妓生ノ稼業ヲ為シタル者ハ十日以下ノ拘留又ハ拾円以下ノ罰金ニ処ス

위의 법령을 간단히 요약하면 기업을 하려고 하는 기생은 부모 또는 친족의 연서 한 서면을 관할 경찰 관서를 거쳐서 경시청에 신고하고 인가증을 받아야 한다. 생업을 폐지할 때는 인가증을 경시청에 반납해야 한다. 인가증을 받지 않고 기업을 하려고 하는 기생은 열흘 이하의 구류 또는 10엔 이하의 벌금에 처하다 라고 되어있다. 이처럼 기생들의 인가증과 수속업무를 권번이 대신하였다.

3.2.2. 동기의 입학금과 수업료 징수

일본의 권번과는 달리 식민지조선 권번에 소속된 동기는 통학을 원칙으로 하고 입학금과 수업료를 내야만 했다. 박화선『내 별호가 진열장 각시였어』에 따르면,

권번이란디도 들어갈라믄 입학금이 일제시대 때 50원이었어. 월사금이 5원이고..근께 우리 어머니가 촌에서 아부지 몰래 그 뒷받침을 헐란께 어쨌겄는가. 월사금이랑 차비랑 주고도 딸 배곯는다고 몰래 쌀을 개구녕으로도 넣어주고 담벼락 우그로도 주고 그랬어.

라고 서술되어 있다. 당시 식민지조선의 권번은 일본 권번과 달리 입학금과 수업료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입학금이 50엔으로 수업료가 5엔이었음을 알 수 있다. 권번의 입학금이 50엔으로 수강료가 5엔이었다는 것은 가정형편이 어려운 집에서 고려하면 결코 저렴한 금액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2.3. 권번기생과 요정의 중개역할

권번에 동기로서 입학하여 교육 과정을 이수해 졸업한 기생은 기업(놀음)이나 공연 활동을 했다. 권번의 사무의 역할로써 기생 대신 요정에서 화대를 징수하고 권번과 기생 사이에서 3:7의 비율로 배분을 하는 것이 있었다. 화대는 시간 단위로 계산되어 기업의 소요 시간과 금액을 쓴 전표를 요정에서 받았고 그 전표를 가지고 권번에 제출하면 시간당 계산되는 기생의 수입이 정해진다. 즉, 그것이 화대이다. 그 화대는 매달 두 차례에 나누어 지급되었다. 박송희의 증언(인터뷰)에 의하면,

권번을 졸업한 기생은 초저녁이 되면 권번의 사무실에서 대기하고 있었어. 요정에서 사무실에 전화가 오면 인력거가 권번에 와서 요정까지 데리고 갔어. 그때, 권번의 사무실에는 명패가 있어서 지휘를 받은 사람은 명패에 있는 이름을 돌려놨어. 일이 끝나면 자기가 일한 시간이 적힌 종이를 요정에서 받아서 사무실에 가져다주었다. 화대는 권번과 기생의 3:7로 나눴어.

그리고 경성의 조선권번의 사무 담당을 하였던 김천흥『 심소 김천흥 무악 칠십년 』에 따르면

기생예약 사무를 보기위해 사무실 밖에는 기생들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명패가 걸려있었고, 책상위에는 4대의 전화기가 놓여있었다. 요정으로 놀음 나가는 시간이 대개 해 긴 여름철에는 오후 6시, 겨울에는 5시부터 시작되었으므로 4시쯤이면 본격적으로 업무가 시작되곤 했다. 이 때 우선으로 해야 할 업무는 5시 예약이 돼있는 기생들 집으로 요정과 기생의 이름이 적힌 전표를 든 인력거꾼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생을 데리러 간 인력거꾼의 번호를 출화장에 기입해 두는 것도 잊지말아야 한다. 5시에 예약된 기생을 보내고 나면 약속이나 한 듯이 이 때부터 여러 요정으로부터 기생을 보내달라는 전화가 쏟아진다. 이 전화 저 전화를 정신없이 받다보면, 이미 예약돼 나가있는 기생을 요구할 때도 있는데 이럴 경우에는 그 사실을 알려줘야 하고 아직 집에 있는 기생일 경우에는 즉히 인력거꾼을 보내게 된다. 인력거꾼이 데리러 간 기생이 외출하고 없으면 주문한 요정에 부재중임을 알림과 동시에 다른 기생이라도 원하는지의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200여명이나 되던 수효로 해서 주소가 확실치 않은 기생도 간혹 있었으므로 이럴 경우에는 동네 이름만이라도 알아내 요정이나 인력거꾼에게 알려주는 것이 사무자들의 책임이기도 했다.

라고 서술 되어있다. 이처럼 박송희는 기생이 권번의 사무실에 대기하고 있었다고 하였지만,김천흥은 기생이 자신의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김천흥은 경성(서울)에 있는 대규모 권번인 것에 반해 박송희는 지방 권번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김천흥이 맡고 있던 경성(서울)의 조선권번은 기생이 200명을 넘어 그 관리를 권번이 했어야 했다. 권번은 기생의 관리뿐만 아니라 고객이 식당에서 이미 예약이 끝난 기생을 지명하는 경우가 일어나는 등에 의해 고객이 불만을 가지지 않게 대응해야 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인력거의 역할이 컸다고 추측된다. 인력거는 기생을 권번에서 기생의 집에 또 집에서 요정으로 이동하는 교통 수단이며, 권번이 기생과 요정을 연결하는 연락망의 역할을 한 것이다.

4.나오면서

20세기 초기의 한국 권번의 실체와 특징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일본 권번과의 비교 고찰하였다. 선행연구를 검토하여 한일의 문헌자료 검 토와 기생과 게이샤에 관련한 단속 법령과 당시의 신문과 기생과 자서전(自伝)과 인터뷰 자료 등을 이용하여 비교고찰을 한 결과, 권번은 일본 에도시대 (江戸時代) 1779년에 요시와라 유곽(吉原遊郭)에서 만들어진 제도로 식민지를 통해 조선사회에 도입된 제도이다.

에도시대 요시와라 유곽의 연회의 중심 인물은 유녀이고 게이샤는 샤미센으로 연회장의 흥을 돋우는 보조적인 역할이었다. 에도 시대에는 유녀와 기생은 의상에 의해서 구별되고 있었다. 게이샤가 유녀의 직분을 침범하지 못하게 그 복장까지 권번에 의해서 통제되었던 것이다. 또한 게이샤가 손님 옆자리에 앉는 것을 금지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에도 시대의 요시와라 유곽의 게이샤는 손님을 접대하는 역할이 아닌 샤미센 연주자로서의 전문예인이었다. 그리고 게이샤의 영업허가는 권번이 주체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에도시대 권번의 역할은 요시와라 유곽 연회공간에서 흥을 돋우는 유녀는 물론 샤미센 연주자로서의 남녀 게이샤와 죠루리와 같은 전문예인까지 권번에 등록하게 하고 관리 감독하였다. 그리고 정부에 세금징수의 사무 등의 일체의 사무를 처리하는 역할과 요시와라 유곽 내에서의 전반적인 역할 그리고 게이샤의 질병이나 곤란에 처해 있을 경우 등을 서포트 역할을 했다.

이 권번제도는 에도시대의 화류계의 조직과 화류계 종사하는 여성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기반을 만든 제도였다. 메이지시대(1868년) 가 시작되면서 정계 재계의 사교장으로 도쿄에 게이샤 하나마치가 형성되었다. 일반적으로 일본의 하나마치는 권번이 총괄하고 삼업(三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삼업 안에는 오키야, 요정, 마치아이(=오차야)로 구성되어있다.

요정과 마치아이와 오차야은 게이샤의 파견장소라고 말할 수 있다. 손님은 이 곳을 통하지 않으면 게이샤를 연회석에 부를 수 없는 시스템이다. 손님은 요정과 마치아이 그리고 오차야와 같은 파견장소에서만 게이샤를 부를 수 있고, 파견장소에서 권번을 통하여 오키야에 연락을 취해 게이샤가 파견장소로 가는 삼업조합 시스템으로 운영됐다. 이 때 삼업조합을 총괄하여 관리하고 전반적인 사무 업무의 일체를 담당했던 곳이 권번이다. 권번의 역할은 게이샤의 하나다이를 집계하는 업무이고 세금의 징수 업무를 했다. 그리고 게이샤가 영업을 하기 위해서는 경찰서에 영업신고가 필요했고 그만둘 때는 폐업신고가 필요했는데 권번이 이를 대신하였다. 그리고 권번이 주최가 되어 삼업조합의 경영이 원활하게 운영될 수있도록 각종 행사와 공연의 준비와 기획을 담당하는 역할을 하였다.

20세기 초기의 한국권번은 일본권번의 역할인 ①게이샤의 하나다이 집계, ②세금 징수, ③경찰서에 기생인가증과 수속업무대행, ④각종 행사와 공연의 준비와 기획 업무는 동일하였던 것으로 보다 일본권번을 모델로 식민지화에 의해 도입되어 한국권번이 설립 운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 한국권번 만이 가지는 특징으로는 권번내의 부속으로 교육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식민지조선 권번은 기생 교육기관으로써 궁중예능과 민간예능이 권번 한곳에 모임으로써 전문예인이 등장하고, 기생을 직업으로 인식하게 하였다. 일본의 통치하에 권번의 설립 목적이 전통예능을 보존하기 위한 기관은 아니지만, 일부의 전통예능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그 맥을 이어가고 있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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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 Dong-ju as a model of empathy and communication in East Asia

Yoon Dong-ju as a model of empathy and communication in East Asia








1. A poet familiar to readers

Yoon Dong-ju's poetry is called the most favorite poems, that are loved by Korean readers. On the other hand, it is the object of researchers' interest in China, Japan, even North Korea. Not only are the research results of researchers being announced constantly, but also "Yoon Dong-joo's poetry reading society" is continuing, poem monument is established, and literature museum is operated. The poet's works are not many, but his poems are published in English and French, and his readership is getting wider. The proliferation of readership shows a wider sympathy for the world.

We call the poet Yoon Dong-ju as a poet of resistance. It is the fate of the poet to tell the justice about what is not right and to deny the injustice. In this respect, the name of resistance is reasonable in view of the situation in the times. On the other hand, some people call him a poet of shame. The constant attitude that can be found in his work is self-reflection. In connection with this, people look at the poet Yun Dong-ju and read the poem from the perspective of faith. The most important thing to emphasize is that Yoon Dong-ju's poetry is based on the emotions of universal humanity.

The voice of the poet that the reader hears in <A candle> comes from the filter paper of the metaphor rather than the direct meaning of the word and sentence. It is sometimes hidden, sometimes it acts as a loudspeaker, and sometimes reveals various colors, shapes, and directions at the same time. Quick of sight readers pay attention to the appearance of the poet in the garment of the metaphor. It is relatively clearly and consistently revealed from poet Yoon Dong-ju. The poet tells his message in a figurative way through familiar things to us. It is a way to look at the world beyond the meaning of contents of poetry.

In this work, a candle illuminates the darkness and is a physical phenomenon that occurs when a candle is lit. Candlelight as a 'tool to illuminate the darkness' is used in the practical field. The primary function of candlelight is illuminating the darkness, but when it passes through the metaphorical network, it builds a new network of meanings. In the reader's reading process, it transcends the medium of lightness as a physical phenomenon. The readers read through it because the poet originally intended it, and they passed the process of symbolizing its discovery.

In this sense, the poet's experience is shaped into poetry, and the reading activity is completed through the process of the reader' s experience it. What is noteworthy here is that the poet has created the work based on his experience from the earliest work. The experience was created through the daily life of the poet, it reflected in the works and the works and life were not separated. The voice that holding poet's discovery and beliefs is approaching the reader as whispers and promises. This means that the poetic speaker is not separated from the poet, and it is one of the main features of the Yun Dong-ju’s poetry.

In the work quoted above, the candle “fires to burn his life". It is revealed as self-sacrifice in the phrase "shedding tears like white jades and blood." The sacrifice functions as a victim and extends to religious beliefs. It wants to accomplish it’s mission by burning itself. Of course, the mission is based on the sense of time calling. It illuminates the surroundings by shining light, adding strength to the path to salvation, but to the candle it means self-destruction. In this poem we find that the concept of self-sacrifice was located in the poet's childhood.

2. Reader's Readings and New Text

Poet Yoon Dong-ju did not publish his poetry in his life. He ended his life in Fukuoka prison when he was studying in Japan. Many victims, including him, were killed unhappily before the day of liberation. Yoon Dong-ju’s poems have become the most favorite ones of the people today, as the poetry was published by efforts of his colleages including professor Jung Byung-wook, became known to the world of poets, and included in the textbooks. It was the first time that readers met poet Yoon Dong-ju's printed name in the Kyung-hyang Newspaper on February 13, 1947.

In 2016, the film was released which has subject of Yoon Dong-ju. The director and screenwriter's opinion writes about the movie <Dongju> as follows. “Yoon Dong-ju was a youth who wanted to be a poet but failed to be it eventually. His poetry approached to me more sadly just because that he could not be appreciated and act as a poet in his lifetime.”

Yoon Dong-ju was a poet who did not get the poet's name in his lifetime, but he wanted to put the name "poet" in his tombstone. Readers of poetry are recreating new text by newly interpreting poet's poems and life. When we look at the poet's life, he was a poet who was not recognized in the same period. He was a poet whose existence was not known.

Popular song is the other creative work of the public. It is ‘Your night’. It was created by cast members of the TV program, and was received public attention. It is a work by young creators to express the voice of a young man who lives here today, using <The Prologue>, <Starry Night>, <Easily written Poem>. Yoon Dong-ju in the novel, <Dongju> witten by Ku Hyo-seo, uses Korean, Japanese, Manchu, and English, but created poems only in Korean. In Lee Jeong-myeong's novel, "The Winding of the Stars," he described Yun Dong-ju at Fukuoka prison. It focuses on the poet 's life and death, but we should stress that the main object is death.

Activities in Japan have been held with the theme of "Yoon Dong-ju's poetry reader’s meeting" centered on the Fukuoka area. There are people who have affection for the poet. They visit Korea and perform events, read poems and discuss them in Japan. Every year, memorial events are being held. A memorial ceremony was held in Japan in celebration of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poet in 2017.

Some readers have created a poem based on poet Yoon Dong-ju. The work was selected as the winner poem of the Jung-ang Korean tranditional three-verse writing contest in Feb. 2017. The author is Park Eun-joo, who was born in Gimcheon, Gyeongbuk. It is the case that the name 'Yoon Dong-ju' or 'Dong-ju' was re-created as Korean tranditional three-verse poem. The judges evaluated the work as "a work that showed healthy lyricism that attracted new hope in the dark despair of black and white, that drawing attention to Yoon Dong-ju's poetry and life-based film ‘Dong-ju’".

Poet Yoon Dong-ju's life and works are interacting with each other as they receive the attention and love of their readers. It provides readers with a source of recreation and nurturing new transformations or enlargements. These changes reflect the changes in the times and the changes in the values ​​of the world, and thus, it is possible to confirm that new works are being created because the viewpoint of 'now and here' is added to Yoon Dong-ju. It is found that poet Yoon Dong-ju plays a role as a source of OSMU, where one source is used in various fields.

3. Code of communication and spirit of the times

The life and poetry of the poet Yoon Dong-ju practiced his time calling as a member of the present day. If we are mindful of his reality, it was the oppressive foundation of confrontation and conflict, but the poet's desire was beyond confrontation and conflict. He was the owner of an honest soul. You can get a glimpse of the sound of conscience and the aspect of an artist in <Another hometown> and <Starry night>. Today, in the presence of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 we can discover the intellectuals who have harmonized litelligence and sensibility and have come up with tasks of the times, from poet Yoon Dong-ju. He was a living intellect and an intellect that practiced in reality.

The way the poet walked throws a message of challenge and action. It is well shown in works such as <The road> and <New road>, and it has been confirmed in circulation experience. A series of challenges and practices, and constant strides showed predictable results. It is a form of honesty and a true politician. In this sense, the poet's message was also to embody the 'common good' in reality. The formation of readers without distinction between enemies and comrades can be seen as leaning on this basis of the poet.

We find the attitude of reflection and inspection that he has been following all the time. This can be confirmed in detail in <Confession>, <The Prologue>. In terms of showing fidelity as a core, this corresponds to the model of Korean classical scholar. It adds strength in that it makes a deep thought and harmony with the practice based on it. Earlier, poet Jung Ji-yong wrote "Did Yoon Dong-ju leave poems that were not ashamed, sad and beautiful? The poem and the poet are like this." It was a condensed expression of the poet Yoon Dong-ju's value.

The poet referred to the reality of the time as a hospital. He seems to have believed that poetry can be a healer. It can be inferred from the fact that he tried to make his poetry and make it a 'healing agent' for reality. What he dreamed of, poetry healing became a reality today. This is also true of Yoon Dong-ju's work, which is read under the sky in Pyongyang, and one of the few writers who are recognized at the same time in North and South is Yoon Dong-ju. Professor Omura also said, "I want to rejoice that the North and South Korean literary viewpoints are nearing a step closer."

Poet Yoon Dong-ju is throwing 'new' text to new readers today through his poetry. The new role is the responsibility of the readers who live today. The source of the poet's message is the common interest. Poet Yoon Dong-ju's code is a common good. In the reading process of Yoon Dong-ju's poetry, readers can confirm that his poetry is the source of universal inspiration. This is the string of empathy and the leverage of reconciliation that connects the readers with the other reader through communication.

The message created through the work and life reveals a distinct reality. It is up to the reader to enlarge and recreate it in a new way. It is the task of those who are in the coordinates of 'today' and 'here' to read the message, to wisely solve the present problems, and to seek wisdom for the future. As for the assets of reflection and anguish left by the poet as the <Confession>, we have to have the shame as the reader today.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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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ationality Concept of Max Weber

The Rationality Concept of Max Weber








1. Einleitung

Der Begriff Rationalität und Rationalisierungsprozess haben für Max Weber eine zentrale Bedeutung, und zwar sind diese beiden Begriffe die wichtigsten Themen im Werk Max Webers anerkannt wor¬den. Aber trotz dieser Einstellung kam wenige Untersuchungen bis¬her vor. Es könnte einen Grund dafür geben, daß Weber nirgendwo eine zusammenfassende und bündige Darstellung bietet. Daher könnte man wahrscheinlich schwer versuchen, seinen Begriff Rationalität herauszufinden und darzustellen. Durch diese Schwierlichkeit gibt es immer noch die Meinungsverschiedenheit der Untersuchungen von Rationalitätbegriff. Eine Meinung heißt, daß Max Weber mit dem Ra¬tionalisierungsprozeß im Grunde nichts als die Entzauberung der Welt oder deren Bürokratisierung glaubt. Andere Autoren Kommenta¬toren ha¬ben die Rationalisierung als einen Prozeß verstanden, der primär oder gar ausschließlich auf eine zunehmende Verbreitung zweckra¬tionalen sozialen Handelns hinausläuft.2) Wieder andere Kommenta¬toren haben ihre Untersuchungen des Rationalitätsbegriffs Webers und seine Manifestationen in historischen Rationalisierungsprozes¬sen auf bestimmte Lebenssphären, wie etwa die religiöse Sphäre, beschränkt.3)

Trotz dieser Meinungsverschiedenheiten muß der Rationalitätbegriff bei Max Weber systematisch untersucht werden, weil dieser Begriff für ihn als einer Kernpunkt gilt. Diese Termini Rationa¬lität und Rationalisierung tauchen nach 1904 in Wirtschaft und Ge¬sellschaft und in den Gesamten Aufsätzen zur Reiligionsso¬ziologie auf. Diese Schriften sind nicht die methodologischen oder politi¬schen Schriften, sondern wurde durch ein anderes Ziel bestimmt, und zwar auf der rein begrifflichen Ebene Webers Vision von der Vielfältigkeit von Rationalisierungsprozessen, die sich auf allen Ebenen soziokutureller Prozess miteinander verbinden und gegenein¬ander kämpfen, zu rekonstruieren. Denn die verschiedenen Typen der Rationalität sind der Basis der Analyse dieser Rationalisierungsprozesse.

Max Weber wollte die Soziologie in den Kontext der Wissen¬schaften vom Handeln gestellt sehen. Die Fassung des Handlungs¬begriffs bedeutet "die Methodologie des Verstehens, die den Beob¬achter befähigt, beobachtetes Handeln in Begriffen des ,,gemeinten Sinnes'' zu erfassen, des Sinnes, den der Handelnde selbst mit dem Handeln verband"4) . Er dachte, daß ein einzelner Handelnder mit seinem Handeln verbindet, und daß ein einzelner Handelnder nur ein Grenzfall ist. Daher hatte er die meisten Begriffsbildungen der Soziologie mit Durchschnittstypen, die die Handlungen vieler Indi¬viduen betreffen, zu tun. Max Weber behauptete auch, daß die ver¬bale Kommunikation zwischen Handelndem und Beobachter im Handeln nötig ist. Das heißt eine zentrale Rolle der sprachlichen Kommuni¬kation im Handeln.

Ich werde hiermit zunächst das soziale Handeln Webers bzw. die kritischen Bemerkungen über das soziale Handeln Webers von Talcott Parsons erläutern, und danach werde ich die Typen der Ra¬tionalität als Begriff und ihre Manifestationen in den Rationalisierungspro¬zessen erklären.

2. Soziales Handeln

Max Weber definiert den Begriff sozialen Handeln als ein Han¬deln, das an etwas orientiert ist, was man die Reaktionen anderer Personen nennen kann. Das Handeln eines Individuums kann in diesem Sinne sozial genannt werden. Die soziale Interaktion, in der zwei oder mehr Individuen wechselseitig an ihrem Handeln orientiert sind, ist besonders wichtig im Handeln.

Auf dem Boden der Begriffe Handeln und soziales Handeln teilte er vier Typen des sozialen Handelns, und zwar affektuelles, tradi¬tionales, wertrationales und zweckrationales Handeln. Diese Typo¬logie Webers bezieht sich auf universelle menschliche Fähig¬keiten. Ihres Dasein ist nicht abhängig von gesellschaftlichen, kulturel¬len oder historischen Verhältnissen.

Die vier Typen können durch zwei Paaren wieder eingeordnet wer¬den, nämlich die beiden Typen des rationalen Handelns und die bei¬den anderen Typen, das affektuelle und das traditionale Han¬deln. Das Webers Interesse lag in den beiden rationalen Typen. Da¬her loht sich es, mit den beiden rationalen Typen zu beginnen.

In der Tat trat der Begriff Zweckrationalität in der wissenschaft¬lichen Diskussion besonders hervor. Durch die Aussage von Talcott Parsons stand Weber zunächst die ökonomische Rationa-lität vor Augen. "Weber arbeitet mit der Unterscheidung zwischen Mitteln, als den Bestandteilen der Situation, die vom Handelnden zur Erlan¬gung seiner Ziele verändert werden können, und Bedin¬gungen, als den "gegebenen" Bestandteilen der Situation, die zu verändern der Handelnde nicht imstande ist." Dabei hat der Han¬delnde Etwas aus den verschiedenen Mitteln auswählen, wenn ein be¬stimmter Zweck ge¬geben ist, um den bestimmten Zweck zu realisieren. Diese ökonomi¬sche Theorie hat mit dem Begriff des Nutzens zu tun. Handeln kann als rational verstanden werden, wenn der Han¬delnde ein gültiges Wissen der Situation besitzt. Aber gütiges Wissen wird gleichwohl immer Momente der Unwissenheit und der Un¬sicherheit enthalten. Weber benutzte auf der Basis dieser Kompo¬nente gültigen Wissen, die die rationale Behandlung des Problems der Unsicherheit ein¬schließt, den Begriff der Rationalität, damit er den Typus von Zweckrationalität bestimmte.

Die Gültigkeit des Wissens ist eine normative Kategorie. Jede Auffassung von Merkmalen einer Situation ist nicht Handeln selbst gültiges Wissen. Diese normative Kategorie bezieht sich auf die Priorität der alternativen Ziele, und ist von den ökonomischen Theoretikern "Nutzen" genannt worden. Diese Nutzenvorstellung ist auch normativ. "Sie hat es mit einem Gleichgewichtsproblem zu tun: einerseits der Dringlichkeit, eines von alternativen Zielen zu er¬reichen, und andererseit den Kosten, in Begriffen der Vorausgabung von Ressourcen, die, in der Situation des Handelnden, knapp in dem Sinne sind, daß nicht alle Zwecke, die er als erstrebens¬wert defi¬niert, in angebbaren Zeitperioden und unter den gegebenen Umstän¬den vollständig realisiert werden können." Bisher genannten Be¬reich bestimmte Max Weber als Begriff der Zweckrationalität.

Wir gehen nun in die Bestimmung Webers von Wertrationalität ein. Hier gibt es seine Definition, und zwar folgendermaßen: Das soziale Handeln kann bestimmt sein wertrational: "durch bewußten Glauben an den - ethischen, ästhetischen, religiösen oder wie im¬mer sonst zu deutenden - unbedingten Eigenwert eines bestimmten Sichverhaltens rein als solchen und unabhängig vom Erfolg."

Weber behauptete die Absolutheit des Wertes und das unbe¬dingte Eigenwert als Begriffskern. Die Gegenüberstellung der abso¬luten Geltung eines Wertes einerseits und der Pluralismus und der Rela¬tivität der Ziele im Falle der Zweckrationalität anderer¬seits, ist einleuchtend. Es ist unklar, ob beide Typen des Han¬delns völ¬lig getrennte Gegensätze sind, oder ob es komplexere Be¬ziehungen zwischen ihnen gibt. Aber Weber betonte in diesem Zusam¬menhang den Begriff unbedingter Eigenwert. Er wollte die absoluten Werten und Zielen, die nicht in demselben Maße mit Wertbedeutungen verbunden sind, voneinander trennen. Nach Talcott Parsons könnte diese Wer¬trationalität zwei primäre Ansatzpunkte gegeben werden: "Der eine ist der rechtliche, der mit der generalisierten normati¬ven Ordnung eines sozialen Systems zu tun hat, die auf die Regu¬lierung des Verfolgens recht irdischer und spezi¬fischer, vornehm¬lich ökonomi¬scher und politischer Interessen bezo¬gen ist. Der zweite Ansatz¬punkt liegt mehr im kulturellen und zielorientieren¬den Gebiet; für Weber ist der Prototyp in diesem Bereich viel¬leicht der religiöse Aspekt absoluter Werte."

Das affektuelle Handeln "steht ebenso an der Grenze und oft, jenseits dessen, was bewußt "sinnhaft" orientiert ist; es kann hemmungsloses Reagieren auf einen außeralltäglichen Reiz sein. Eine Sublimierung ist es, wenn das affektuell bedingte Handeln als bewußte Entladung der Gefühlslage auftritt: es befindet sich dann meist (nicht immer) schon auf dem Wege zur "Wertrationalisierung" oder zum Zweckhandeln oder zu beiden" . Nach Talcott Parsons bezieht sich dieses affektuelles Handeln für Weber auf die psycho¬analytische Theorie im Bereich der Individualpsychologie. In der Tat hat er den Einfluß auf Sigmund Freud aufgenommen. Und Freud gebraucht selbst das Wort Affekte, das benutzt auch Weber.

Das traditionale Handeln hat in Webers vielen empirischen Un¬tersuchungen sozialer und kultureller Systeme eine sehr wichtige Rolle gespielt. Dieses handeln ist die rein reaktive Nachahmung und steht "ganz und gar an der Grenze und oft jenseits dessen, was man ein "sinnhaft" orientiertes Handeln überhaupt nennen kann. Denn es ist sehr oft nur ein dumpfes, in der Richtung der einmal eingelebten Einstellung ablaufendes Reagieren auf gewohnte Reize. Die Masse alles eingelebten Alltagshandelns nährt sich diesem Ty¬pus, der nicht nur als Grenzfall in die Systematik gehört, sondern auch deshalb, weil (wovon später) die Bindung an das Gewohnte in verschiedenem Grade und Sinne bewußt aufrecht erhalten werden kann" .

3. Rationalität

3.1. Praktische Rationalität

Max Weber versteht unter praktischem Rationalismus jede Le¬bensführung, die die Welt bewußt auf die rein pragmatischen Inter¬essen des einzelnen Ich bezieht und beurteilt.

Diese praktische Rationalität hat genau im Gegenteil zu den Handlungsmustern, die z.B. die Routine des t„glichen Lebens ange¬sichts des eines obersten absolutes Wertsystem aktiv zu manipu-lieren suchen. Die praktische Rationalität, sozusagen die prakti¬sche rationale Lebensführung, nimmt die gegebenen Realitäten an und berechnet nur, zweckrational, die Mittel, mit ihren Schwierig¬keiten fertig zu werden. Die gegebenen praktischen Ziele werden durch das methodische Abwägen und präzisere Berechnung der adäqua¬ten Mittel erreicht.

Der ökonomische Rationalismus in seiner Entstehung, wie die rationale Technik und das rationale Recht, ist von der Fähigkeit und Disposition der Menschen zu praktisch-rationaler Lebensführung überhaupt abhängig. "Gemeinsam und durch die Natur ihrer von der ökonomischen Naturgebundenheit stärker losgelösten Lebensfüh¬rung bedingt war ihnen ja die Tendenz zum praktischen Rationa¬lismus der Lebensführung." Und diese Tendenz zum technischen und ökonomischen knüpft mit der ethischen rationalen Lebensführung an. Alle bürgerlichen Schichten, beispielsweise Handwerker, Händler und hausindustrielle Unternehmer, haben die Neigung, ihre Lebensführung angesichts ihrer Eigeninteressen auf praktische ra¬tionale Art und Weise einzuordnen. Dieser Lebensstil kennzeich¬net die "typische Eigenart der Völker des „liberum arbitrium“, wie es dem Italiener und Franzosen in Fleisch und Blut steckt" .

3.2. Theoretische Rationalität

Dieser Rationalitätstyp muß durch abstrakte Begriffe statt durch Handeln aufgebaut werden, nämlich geistige Prozesse wie lo¬gische Induktion und Deduktion, die kausale Verbindung und die Konstruktion von symbolischem Sinn. Das heißt, daß diese theoreti¬sche Rationalität als alle abstrakten Denkprozesse in all ihren verschiedenen aktiv Formen bestimmt. Sie bezieht sich sehr eng mit dem philosophischen Denken und religiösen Denken. "Vor allem die Eigenart der Intellektuellenschichten war dabei von der größten Tragweite. So überaus gleichgültig es für die religiöse Entwick¬lung der Gegenwart ist, ob unsere modernen Intellektuellen das Be¬dürfnis empfinden, neben allerlei andern Sensationen auch die ei¬nes „religiösen“ Zustandes als „Erlebnis“ zu genießen, gewisser¬maßen um ihr inneres Ameublement stilvoll mit garantiert echten alten Gerätschaften auszustatten: ...... , so überaus wichtig war die Eigenart der Intellektuellengeschichten in der Vergangenheit für die Religionen. Ihr Werk vornehmlich war die Sublimierung des religiösen Heilsbesitzes zum „Erlösungs“-Glauben. Die Konzeption der Erlösungs-Idee war an sich uralt, wenn man die Befreiung von Not, Hunger, Dürre, Krankheit und - letztlich -Leid und Tod mit darunter begreift." "Stets ist die Erlösung, die der Intellek¬tuelle sucht, eine Erlösung von "innerer Not" und daher einerseits lebensfremderen, andererseits prinzipielleren und systematischer erfaßten Charakters, als die Erlösung von äußerer Not, welche den nicht privilegierten Schichten eignet. Der Intellektuelle sucht auf Wegen, deren Kasuistik ins Unendliche geht, seiner Lebensfüh¬rung einen durchgehenden "Sinn" zu verleihen, also "Einheit" mit sich selbst, mit den Menschen, mit dem Kosmos. Er ist es, der die Konzeption der "Welt" als eines "Sinn"-Problems vollzieht. Je mehr der Intellektualismus den Glauben an die Magie zurückdrängt, und so die Vorgänge der Welt "entzaubert" werden, ihren magischen Sinngehalt verlieren, nur noch "sind" und "geschehen", aber nichts mehr "bedeuten", desto dringlicher erwächst die Forderung an die Welt und "Lebensführung" je als Ganzes, daß sie bedeutungshaft und "sinnvoll" geordnet seien." Diese Bemühungen der Intellektuel¬len hat eine große Rolle gespielt, die gegebene Wirklichkeit zu transzendieren und die Welt als sinnvollen Kosmos zu verstehen.

Obwohl theoretische Rationalität die Wirklichkeit durch Den¬ken beherrscht, enthält sie die Möglichkeit, Handlungsregelmäßig¬keiten indirekt herzustellen. In der Tat haben die abstrakte Rationali¬sierungsprozesse in den Entzauberungsprozessen eine be¬sonders enorme Rolle gespielt. "Das Leben des Buddha, Jesus, Fran¬ziskus zu führen, scheint unter den technischen und sozialen Be¬dingungen ra¬tionaler Kultur rein äußerlich zum Mißerfolg verur¬teilt."

3.3. Materiale Rationalität

Die materiale Rationalität ist ähnlich die praktische Rationa¬lität. Sie ordnet Handlungen direkt zu Handlungsmustern. Max We¬ber hat selbst eine Bezeichnung der materialen Rationalität gege¬ben. Als materiale Rationalität soll "bezeichnet werden der Grad, in welchem die jeweilige Versorgung von gegebenen Menschen¬gruppen (gleichviel wie abgegrenzter Art) mit Gütern durch die Art eines wirtschaftlich orientierten sozialen Handelns sich gestaltet unter dem Gesichtspunkt bestimmter (wie immer gearteter) wertender Po¬stulate, unter welchem sie betrachtet wurde, wird oder werden könnte." Wertpostulate implizieren für Weber Konstellationen von Werten, die sich nach ihrem Umfang, ihrer inneren Konsequenzen und ihrem Inhalt unterschieden. Darum bezieht sich diese Rationa¬lität auf die menschliche Fähigkeit und auf Wertrationalität.

Die materiale Rationalität kann durch einen bestimmten Be¬reich erläutern. Die Freundschaft stellt eine Form materialer Rationali¬tät dar, insofern sie Werte wie Loyalität, Mitleid und gegensei-tige Hilfe fordert und fördert. Kommunismus, Feudalismus, Sozia¬lismus, Buddhismus, Hinduismus oder die Weltanschauung der Renais¬sance sind die Beispiele für materiale Rationalitäten.

Die materiale Rationalität betrachtet auf jeden Fall als die „gültige Kanon“ , als ein vereinheitlichender "Maßstab", nach dem die empirischen Ergebnisse und die Wirklichkeit ausmacht, beurteilt und gemessen wird. Denn prinzipiell gibt es sehr viele Gesichtspunkte, damit man das menschliche Handeln und Lebensfüh¬rungen ordnen könnte. Dafür gibt es einige Beispiele: Verbände, politische Gebilde, Kulturen und Zivilisationen.

"Die Wertpostulate weist auf seinen radikalen Perspektivis¬mus. Der radikale Perspektivismus bindet die Durchsetzung eines Ratio¬nalisierungsprozesses vornehmlich an implizite oder der ex¬plizite, unbewußte oder bewußte individuelle Präferenzen für identifizier¬bare letzte Werte und die Systematisierung des Han¬delns und der Lebensführung nach diesen Werten." Die Rationali¬tät dieser Werte entsteht aus ihrem Status als konsistenten Wertpostu¬laten. Das Irrationale ist nichts feststehendes, sondern es ergibt sich als irrational aus der Unvereinbarkeit eines letz¬ten Wertgesichtspunkts mit anderen.

3.4. Formale Rationalität

Die formale Rationalität hat ganz allgemein mit Lebensphären, Herrschaftstrukturen, Sphäre der Ökonomie, Sphäre des Rechts, Wis¬senschaftssphäre und die bürokratische Herrschaft zu tun, während praktische Rationalität immer eine Neigung zur Lösung alltäglicher Probleme durch pragmatisches Handeln enthält.

Die formale Rationalität legitimiert durch eine universal an¬gewendete Regel, Vorschrift, oder ein Gesetz. Der Kernpunkt der Orientierung des Handelns an universal verwendeten formalen Regeln und Gesetzen ist das Absagen des jeden Willkür. "Die "Rechtgleichheit" und das Verlangen nach Rechtsgarantien gegen Willkür fordern die formale rationale "Sachlichkeit" der Verwal¬tung im Gegensatz zu dem persönlichen freien Belieben und der Gnade der alten Patrimonialherrschaft."

Die formale Rationalität gibt es auch im Bereich des Rechts, wenn formal ausgebildete Juristen allgemeine Gesetze ausführen. " "Formal" aber ist ein Recht insoweit, als ausschließlich eindeu¬tige generelle Tatbestandsmerkmale materiell-rechtlich und prozes¬sual beachtet werden."

4. Rationalisierungsprozess

Der Begriff der materialen Rationalität ist für den perspekti¬vischen Charakter des Rationalitätsbegriffs Max Webers verantwortlich. Dieser Begriff ist zusammen mit dem Begriff der ethi¬schen materialen Rationalität als Ausgangspunkt der gesamten Ana¬lyse bezeichnet worden. Die ethischen materialen Rationalitäten haben die analytische Kraft, um die formale Rationalisierungspro¬zesse zu leiten und zu kontrollieren. Die ethischen Rationalitäten können dann den theoretischen Rationalisierungsprozessen einen Wertinhalt verschaffen. Sie bewegen in einer bestimmten Richtung als Wertrationalisierungsprozesse und lassen umfassende innerlich vereinheitlichte Werkkonstellationen und Weltbilder zu entstehen.

Der Begriff des ethischen materialen rationalen Handelns von Weber und die Betonung der divergierenden Richtungen der in Werten begründeten Rationalisierungsprozesse erklärt seine Ablehnung al¬ler Erklärungen des Fortschreitens der Rationalisierung als Mani¬festation entweder einer Anpassung an gegebene Realitäten oder ei¬nes bloßen Interessenkonfliktes. Ethische materiale Rationalitäten sind für Weber mit einer überlegenen, längerfristig wirksamen Fä¬higkeit ausgestattet, das Handeln zu rationalisieren. Wenn gün¬stige ökonomische, politische und soziale Faktoren gegeben waren, waren die Unterschiede des "Sinnes" und Motivierung des Handelns von größter Bedeutung für das Verständnis der Entwicklungen, die die Rationalisierung in verschiedenen Zivilisationen nahm.

Max Weber hielt die Typen der Rationalität nicht für Selbst¬zweck, sondern für heuristische Werkzeuge, die er benutzte, um die historischen Wege der Rationalisierung als soziokulturelle Pro-zesse zu untersuchen. Welcher Rationalisierungsprozeß oder welche Prozesse jeweils die verschiedenen Lebenssphären durchdringen, wollte er zunächst feststellen. Dann wollte er weiter herausfin¬den, welche Durchsetzungskraft diese Prozesse besitzt.

Die Rationalisierungsprozesse tauchen in verschiedenen Gestal¬ten hier und da auf und verschwinden wieder, wie einzelnen Fä¬der eines Wandteppichs. Die Webersche Zeichnung dieses vielfar¬bigen Netzes ist reich an Paradoxen und Ironie. Dafür gibt es einen be¬rühmten Beispiel, und zwar seine Bemerkungen über die Ir¬rationalität aus der Perspektive eines rein eudämonischen Eigenin¬teresse der calvinistischen Arbeitsethik. Weber vermerkt wieder¬holt, wie Gruppen von Individuen Freiheitsr„ume schaffen, indem sie der fragmentierten Realit„t mit rationalen Handlungs- mustern begegnen. Wenn diese Handlungsmustern jedoch zu einem Extrem ge¬fhrt werden, kann es geschehen, daá dieselbe gruppen ein Netzwerk der H”rigkeit knpfen.

Die praktischen theoretischen und formalen Rationalisierungs¬prozesse in den modernen abendl„ndischen Gesellschaften sind wich¬tiger als die materialen Rationalisierungsprozesse. Das juedisch-christliche Weltbild, das fuer bedeutsame Lagen von mate¬rialen und ethischen materialen Rationalit„ten und fuer die theore¬tische Ra¬tionalisierung ihrer Werte den Bezugspunkt bildete, ist heute wei¬tergehend durch ein wissenschaftliches Weltbild ersetzt worden.

Mit Aufstieg der Wissenschaft hat fuer Weber eine besonders schicksalhafte Konsequenz. Die Konsequenz heiát, daá die Werte dem Bereich des Glaubens entzogen werden. Durch den Aufkommen des Glaubens werden die wissenschaftlichen Weltbilder, die Werte der empirischen Beobachtung, mathematisches Denken unterworfen. Aber diese Entwicklung stand fuer Weber "in prinzipiellem Gegensatz zu allen religi”sen Weltanschauungen, die als ethische Postulate den Sinn des diesseitigen Lebens und bestimmter Arten des Handelns da¬durch sicherten, dass sie von Wert fuer diese oder jene Erl”sungs¬lehre waren" . Die theoretische Rationalisierungsprozesse, die in der Vergangenheit die einzelnen Werte der primitiven Religionen zu innerlich einheitlichen Wertkonfigurationen geformt hatten, die die Allgegenwart diesseitigen Leidens umfassend zu erkl„ren ver¬mochten, werden in der Neuzeit von ihrer Einbindung in Werte be¬freit. Und diese Prozesse wurden nach dem 20.Jahrhundert als die leeren abstrakten Denkweisen verstanden, sowie die Religion als Opfer des intellekts und als irrational. Dies ist eine Wandlung der theoretischen Rationalisierung von der Religion zur Wissen¬schaft, sofern diese Wandlung mit formalen, praktischen und anderen theoretischen Rationalisierungsprozessen, die nicht von Werten kontrolliert wurden, zusammenfiel. Das ist eine Folge fuer das Schicksal methodisch-rationalen Lebensfuehrung.

5. Schlußwort

Bisher habe ich versucht, einige Bemerkungen über die Rationa¬lit„tsbegriffe und die Rationalisierungsprozesse darzustel¬len und zu erklären. Diese Überlegungen sind im Zusammenhang mit soziokuturellen Veränderungen zu sehen, die insbesondere die Frage nach der Rationalität, der Rationalisierung und der Rationalisier¬barkeit sozialen Handelns in neuer Weise zum Problem werden las¬sen. Jede Sozialwissenschaft ist eine Systematisierung und Ratio-nalisierung der Alltagserfahrung. Darum muß jede Kritik der Sozi¬alwissenschaft und jede kritische Weiterentwicklung dem Pro¬blem der Rationalität eine zentrale Stelle geben. Dieses Thema über Ra¬tionalität bzw. das Problem bei Max Weber muß im Bezug auf die heutige Soziologie, Religion, Recht, Politik, Erziehung, Wissen¬schaft und Wirtschaft weiter untersucht werden.


Footnotes

[1] Uni. Halle-Wittenberg, yckimphil@hanmail.net

[2] Vgl. Richard Münch, Max Webers Anatomie des okzidentalen Rationalismus. In: Soziale Welt 29(1978), S.217-246.

[3] Vgl. Friedrich H. Tenbruck, Das Werk Max Webers. In: Kölner Zeitschrift für Soziologie und Pszialpsychologie 27(1975), S.663-702.

[4] Talcott Parsons, Rationalit„t und der Prozeß der Rationalisierung im Denken Max Webers. In: Max Weber und die Rationalisierung sozialen Handelns, hrsg. v. Walter M. Sprondel und Constans Seyfarth, Stuttgart 1981, S.81.

[5] Vgl. Johannes Weiß, Rationalität als Kommunikabilit„t. In: Max Weber und die Rationalisierung sozialen Handeln, hrsg. v. Walter M. Sprondel und Constans Seyfarth, Stuttgart 1981, S.39-58.

[6] Vgl. Talcott Parsons, The Struktur of Social Action, New York 1968.

[7] Talcott Parsons, Rationalität und der Prozeß der Rationalisierung im Denken Max Weber, a.a.O., S.82.

[8] Ebd. S.83.

[9] Max Weber, Wirtschaft und Gesellschaft, 5. Aufl., Tübingen 1972, S.12.

[10] Talcott Parsons, Rationalit„t und der Prozeá der Rationalisierung im Denken Max Weber, a.a.O., S.86.

[11] Max Weber, Wirtschaft und Gesellschaft, a.a.O., S.12

[12] Vgl. Talcott Parsons, Rationalit„t und der Prozeá der Rationalisierung im Denken Max Weber, a.a.O., S.87.

[13] Max Weber, Wirtschaft und Gesellschaft, a.a.O., S.12.

[14] Vgl. Max Weber, Gesammelte Aufs„tze zur Religionssoziologie I, 4 Aufl., Tbingen 1947, S. 62.

[15] Vgl. Ebd. S.266.

[16] Vgl. Ebd. S.12.

[17] Ebd. S.256.

[18] Vgl. Ebd. S.257.

[19] Vgl. Ebd. S.256.

[20] Ebd. 62.

[21] Ebd. S.252.

[22] Max Weber, Wirtschaft und Gesellschaft, a.a.O., S.307-308.

[23] Max Weber, Gesammelte Aufsätze zur Religionssoziologie I, a.a.O., S.571.

[24] Max Weber, Wirtschaft und Gesellschaft, a.a.O., S. 44.

[25] Vgl. Stephen Kalberg, Max Webers Typen der Rationalit„t. Grundsteine fr die Analyse von Rationalisierung-Prozessen in der Geschichte. in: Max Weber und die Rationalisierung sozialen Handelns, hrsg. v. Walter M. Sprondel und Constans Seyfarth, Stuttgart 1981, S.16.

[26] Ebd. S.17.

[27] Vgl. Max Weber, Gesammelte Aufs„tze zur Religionssoziologie I, a.a.O., S.62.

[28] Max Weber, Wirtschaft und Gesellschaft, a.a.O., S.565.

[29] Ebd. S.396.

[30] Vgl. Stephan Kalberg, Max Webers Typen der Rationalit„t, a.a.O., S.29.

[31] Vgl. Ebd. S.30.

[32] Vgl. Max Weber, Gesammelte Aufs„tze zur Religionssoziologie I, a.a.O., S.62.

[33] Vgl. Stephan Kalberg, Max Webers Typen der Rationalit„t, a.a.O., S.31.

[34] Ebd. S.31.

[35] Vgl. Max Weber, Gesammelte Aufs„tze zur Religionssoziologie I, a.a.O., S.253.


References

1 . Weber,Max, Wirtschaft und Gesellschaft, 5.Auflage, besorgt von Johannes Winckelmann, Tübingen 1972., 

2 . ders, Gesammelte Aufsätze zur Religionssoziologie I, 4. Auflage, Tübingen 1947., 

3 . ders, Gesammelte Aufsätze zur Wissenschaftslehre, 3.Auflage, hrsg. v. Johannes Winckelmann, Tübingen 1968., 

4 . Käsler,Dirk(Hrsg.), Max Weber, Muenchen 1972., 

5 . Münch,Richard, Max Webers Anatomie des okzidentalen Rationalismus. In: Soziale Welt 29(1978)., 

6 . Parsons,Talcott, The Struktur of Social Action, New York 1968., 

7 . Schluchter,Wolfgang, Die Paradoxie der Rationalisdierung. In: Zeitschrift fuer Soziologie 5(1975)., 

8 . Sprondel,Walter M.(Hrsg.), Max Weber und die Rationalisierung sozialen Handelns, Stuttgart 1981., 

9 . Tenbruck,Friedrich H., Das Werk Max Webers. In: Kölner Zeitschrift fuer Soziologie und Sozialpsychologie 27(1975)., 

10 . Vogel,Ulrike, Einige Überlegungen zum Begriff der Rationalit„t beiMax Weber. In: Kölner Zeitschrift fr Soziologie und Sozialpsychologie 25(1973)., 

11 . 류성희, 하버마스의 막스 베버 합리성에 대한 오해, „사회연구“ 21호, 한국사회조사연구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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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layman arahant theory -Conflict between renunciants and lay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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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問題の所在

在家者が阿羅漢になりうるかというのは、出家者中心の僧団の立場が背景に置かれている問題である。実際、この問題は両側の対立、あるいは葛藤の側面があると思われる。この問題が歴史の中で表面化されたのは、恐らく、紀元前3世紀頃であろう。なぜならば、我々が確認できる文献の中で、在家阿羅漢を扱っているのはKvであるからである。そのKvが作られたのは紀元前3世紀頃からである。

Kvの註釈書によると、在家阿羅漢論を主張した部派は北道派(Uttarāpathaka)である。この北道派が在家阿羅漢論を提示するまでには、この問題が議論されたことがないと思われる。Kv以前に、この問題が議論されたという記録は現在まではないからである。

では、ブッダが悟りを得、いわゆる初転法輪を始めて以来、北道派が問題を提示するまでには在家者の阿羅漢問題はまったく問題視されてなかったのであろうか。この点については何とも言えないが、ただ推測として言えるのは暗黙的にはその可能性を認めていったかもし知れないし、あるいはそれを当たり前のように考えていたかも知れない。なぜならば、在家者の解脱、あるいは悟りを認めている経典がパーリニカーヤと阿含の中で存在しているからである。

しかし、北道派がどうしてその時、この問題を取り上げ問題としたのか。これは、恐らく大乗仏教の成立と関係付けて考えるべきであろう。しかし、この問題は本項の目的ではないので、これ以上は言及しないことにする。

とにかく、在家阿羅漢論は、部派仏教において、論難を起こした重要なテーマの中で一つであるのは違いない。したがって、この項においては、在家阿羅漢論がどのように展開されているのかを調べることにしたい。

主知のように、これをテーマにした従来の研究は、藤田宏達(1964)と浪花宣明(1987)の研究がある。そのなかで、藤田宏達の研究は初期経典から上座部と説一切有部の説を比較し、在家阿羅漢について詳しく検討し、仏教本来の立場は在家者であっても、解脱涅槃に至ることができると指摘している。また、上座部や説一切有部の場合、「即日出家」説で一致しているのを明らかにしており、仏教本来の立場は大乗仏教の中で明確にされていると結論づけている。浪花宣明の場合は、12世紀ごろの文献であるUpāsakajanālaṇkāraを分析し、在家者がどのような修行方法によって阿羅漢になれるのかを明らかにしている。しかし、この論文は5世紀ごろまでの文献を対象にしているため、Upāsakajanālaṇkāraの内容は排除する。

2. ニカーヤ・阿含における在家者の解脱

ニカーヤ・阿含には在家阿羅漢という語は見つからない。しかし、在家者の解脱に関しては語っている。まず、在家法と比丘法をついて説かれている内容を見てみよう。

不必從他乞  得名為比丘  雖具在家法  正修於梵行  福果及惡報  俱斷無相著  乾竭諸有結  是名比丘法(『別譯雜阿含經』T2, p.466.)

必ず他人を従い乞食しないのを比丘と名づける。たとえ、在家の法を具えていても、梵行において正しく修行すれば、福果と悪報をすべて執着せず断じ、あらゆる有結を乾かせる。これを比丘法という。

ここでは、在家の法と比丘の法が別にあるのではないと説いている。すなわち、梵行を正しく修行し、すべての有結を断じれば、それが比丘の法であると明らかにしている。これによると、在家と比丘との間に何の差異も認められていないのがわかる。もう一つの例を挙げてみよう。

evaṃ vimuttacittassa kho Mahānāma upāsakassa vassasatavimuttacittena bhikkhunā na kiñci nānākaraṇaṃ vadāmi yad idaṃ vimuttiyā vimuttan ti.(SN.V, p.410)

マハーナーマよ、このように解脱した心を持っている優婆塞と百年の間解脱した心を持っている比丘とには何にも差がない。解脱した者に解脱において、[何も差がないという]これを私は説く。

ここにおいても、『別譯雜阿含經』と同じく、在家と比丘との差異を認めておらず、なおかつ、在家として解脱が得ることが可能であることをはっきり示している。もっと具体的な例を挙げてみよう。

chahi bhikkhave dhammehi samannāgato Tapusso gahapati tathāgate niṭṭhaṃ gato amataddaso amataṃ sacchikatvā iriyati. katamehi chahi ?

buddhe aveccappasādena, dhamme aveccappasādena, saṅghe aveccappasādena, ariyena sīlena, ariyena ñāṇena, ariyāya vimuttiyā.(AN III, p.450~451)

比丘たちよ、六法によって具足したタプッソ長者は如来に対して完璧を得た者であり、不死を見た者であり、不死を悟って行為する。六とは何か。

ブッダに対する不壊の信頼によって、教えに対する不壊の信頼によって、僧伽に対する不壊の信頼によって、聖なる戒、聖なる智慧、聖なる解脱によって[である]。

ここでは、タプッソ長者を含め21人の長者が同じく不死を悟って行為すると説かれている。藤田宏達が指摘したように(1964:64)、ここには阿羅漢になったという記述は見当たらない。この点を持って、彼は実際には上座部がこれを認めていなかったと見ており、さらに、それにもかかわらず、この経説が存在しているのは在家者への配慮ではないかと指摘している。

しかし、阿羅漢という語を使ってないとしても、「不死をみて、不死を悟った」というのは、これはブッダが初転法輪の時、五比丘に宣言した「私は不死に至ったamataṃ adhigataṃ」と匹敵する表現ではなかろか。また、在家者の解脱を認めても、ブッダやブッダの弟子に与えられる呼称である阿羅漢を使うことには拒否感を感じたかも知れない。

こうみると、後のKvの主張とは矛盾するようになるが、上座部が初期段階からKvが作られる頃まで、ずっと在家阿羅漢を認めなかったという証拠はどこにもない。とはいっても、認めたという証拠もない。しかしながら、仏滅後Kvの時代までは約200年の空白があるので、その間、出家比丘たちの考え方が変わったかも知れないといえば言い過ぎであろうか。

また、漢訳『雜阿含經』(T2, p.215a)にも、三宝に対する不壞淨を成就した者は在家であるが解脱に住する(在家而住解脫)としている。しかし、この用例は上の三つの用例と違って、阿羅漢とは関係ないと思われる。経典どこにも、三宝に対する不壞淨だけで阿羅漢になったという記述はないからである。

とにかく、初期経典においては、数少ないが、在家者の解脱を認めていったというのは事実である。

3. Kvにおいての在家阿羅漢論

Kv.には、先にも記述したように、北道派の主張を挙げて、在家阿羅漢の可能性を否定している。その内容を簡単に再構成してみよう。

gihīssa arahā ti? Āmantā / atthi arahato gihisaṃyojananti? / na hevaṃ vattabbe ... pe

[上座部]在家の阿羅漢[はいるのか]。

[北道派] そうだ。

[上座部] 阿羅漢には在家の束縛があるのか。

[北道派] 実にこのように言われてはいけない。

atthi koci gihī gihisaṃyojanaṃ appahāya diṭṭheva [225]dhamme dukkhassantakarotī? natthi / hañci natthi koci gihī gihisaṃyojanaṃ appahāya diṭṭheva dhamme dukkhassantakaro.

[上座部] ある在家者が在家の束縛を断じなくて、いまここにおいて苦の終わりを成す者が いるのか。

[北道派] いない。

nanu Vacchagotto paribbājako bhagavantaṃ etad avoca - “atthi nu kho, bho Gotama, koci gihī gihisaṃyojanaṃ appahāya kāyassa bhedā dukkhassantakaro”ti? “natthi kho, vaccha, koci gihī gihisaṃyojanaṃ appahāya kāyassa bhedā dukkhassantakaro”ti / attheva suttantoti? Āmantā.

[上座部] 流行者ヴァッチャゴッタが世尊にこのように言った。「ゴータマよ、実にある            在家者が在家の束縛を断じなくて、体の破壊より苦の終わりを成す者がいます               か。」「ヴァッチャよ、実にある在家者が在家の束縛を断じなくて、体の破壊より苦の終わりを成す者はいない。」と。あなたたちはこのような経典があるのか。

[北道派] そうだ。

na vattabbaṃ - “gihīssa arahā”ti? Āmantā / nanu Yaso kulaputto, Uttiyo gahapati, Setu mānavo, gihibyañjanena arahattaṃ pattoti? Āmantā / hañci Yaso kulaputto, Uttiyo gahapati, setu mānavo, gihibyañjanena arahattaṃ patto, tena vata re vattabbe -“gihīssa arahā”ti / gihīssa arahāti kathā niṭṭhitā /

[北道派] 在家の阿羅漢[がいる]と言われてはいけないのか。

[上座部] そうだ。

[北道派] 良家の息子ヤサ、長者ウッティヤ、若いバラモンセートウが在家の姿を持って             阿羅漢性を得たのではないか。

[上座部] そうだ。

[北道派] もし、良家の息子ヤサ、長者ウッティヤ、若いバラモンセートウが在家の姿を             持って阿羅漢性を得たとすれば、それでは、実にこのように言うべきである。             在家の阿羅漢[はいる]と。

以上が論議の重要部分である。この内容の核心は「在家の束縛gihisaṃyojana」と「在家の姿gihibyañjana」である。ここで、上座部が北道派を非難しているのは在家の本質を在家の束縛ではなく、在家の姿で求めていることである。すなわち、ヤサなどを例で挙げたのがそれである。

しかし、藤田宏達が指摘したように(1964:56)、北道派がヤサを例として挙げたのは出家者ではなく在家のままで阿羅漢になったということであろう。

また、上座部の非難のように、果たして北道派は在家の本質を在家の姿において探したのか。そうではないはずであろう。『別譯雜阿含經』には、在家の束縛として、睡眠と愛欲を挙げている。すなわち、根本的な煩悩を在家の束縛であるとしている。

恐らく、北道派が主張したのは在家のままでも煩悩を断切り、阿羅漢になりうるということではなかろうか。阿羅漢になって、そのあと、出家するのは別の問題であろう。

4. 『ミリンダパンハー』の見解

『ミリンダパンハー』には、在家の阿羅漢と関連づけて見ることができる部分が二つある。一つは「外的な説話(Bāhirakatha)」の中にあり、二つめは「矛盾の問い」という対話に含まれている。

まず、ミンリンダ王と尊者アーユパーラとの対話を見てみよう。

bhante, koci gihīpi dhammacārī samacārī”ti? “āma, Mahārāja, atthi gihīpi dhammacārī samacārī, Bhagavati kho, Mahārāja, Bārāṇasiyaṃ Isipatane Migadāye dhammacakkaṃ pavattente aṭṭhārasannaṃ brahmakoṭīnaṃ dhammābhisamayo ahosi, devatānaṃ pana dhammābhisamayo gaṇanapathaṃ vītivatto, sabbe te gihibhūtā, na pabbajitā.(Mil, pp.19~20)

尊者よ、では在家者にも真理を行い、寂静を行う者がいますか。と[訪ねた]。そうです。大王よ、在家者にも真理を行う者、寂静を行う者がいます。大王よ、世尊がバーラーナシの鹿野園で、真理の輪を転じていたとき、18名の最高のバラモンたちに法の現観がありました。また、神たちの法の現観がその時にありました。彼らはすべて在家の状態[であって]、出家の状態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

ここで、アーユパーラは在家者にも真理を行い、寂静を行う者がいるとはっきり言っている。これに対して、ミンリンダ王は「あなたたちの出家は無益である(niratthikā tumhākaṃ pabbajjā)と反問するが、アーユパーラは沈黙で答えなかった。ここでは、上座部は在家者の解脱/悟りを認定しているものの、在家と出家との差については一言も語ってない。

しかし、ナーガセーナとの対話の中では、「在家者であれ、出家者であれ、正しく実践すれば正理の善法を成就する」といい、在家と出家の差異がないとする一方で、出家には無量の功徳(na sakkā pabbajjāya guṇā parimāṇaṃ kātuṃ)があるということを挙げ、両者を区別している。これによって、アーユパーラが答えなかったことについて代わりに答えている。

次に、在家阿羅漢についてのナーガセーナの答弁を見てみよう。

yo gihī arahattaṃ patto dve v' assa gatiyo bhavanti, anaññā. tasmiṃ yeva divase pabbajati vā parinibbāyati vā. na so divaso sakkā atikkametun(Mil. pp.264~265)

阿羅漢性を獲得した在家者、彼には二つの道があり、他の[道]はないです。その日に出家するか、般涅槃するのです。彼はその日を越えてはいけないのです。

ここにおいて、在家のままで阿羅漢になるのを認めているが、それはその日だけである。その日に直ちに出家するか死を選ぶかしかない。死を選ぶ時とは、その日阿闍梨(ācariya)や和尚(upajjhāya)や衣鉢(pattacīvara)などを揃えることができない場合である。その理由を

Visamaṃ mahārāja gihilingaṃ, visame linge lingadubbalatāya arahattaṃ patto gihī tasmiṃ yeva divase pabbajati vā paninibbāyati vā ; n' eso mahārāja doso arahattassa, gihilingass' eso doso, yad idaṃ lingadubbalatā.(Mil.p.265)

大王よ、在家の特質は不正であります。特質が不正であるとき、特質の弱さのために、阿羅漢性を獲得した在家者はその日において出家するか般涅槃するのです。大王よ、その過失は阿羅漢にはないです。その過失は在家の特質です。すなわち、特質の弱さなのです。

と語っている。

即日出家説は、藤田宏達(1964:59)が指摘したように、ヤサの場合に照らしてみると見事な答えである。しかし、在家のままで阿羅漢性を保ち続けることは認められてない。

また、即日出家、即日涅槃の理由としては在家の特質の弱さを挙げている。ナーガセーナは小さな草の上に重い岩を置くと崩れてしまうという話を挙げ、在家の特質を小さな草に、阿羅漢性を重い岩に例えている。すなわち、阿羅漢になった在家者は自然に在家の特質を捨てるようになりかねないと言っているようである。

これは藤田宏達の「結局在家阿羅漢は実質的に否定されるものと言わぬばならない。すなわち、この見解は根底的には上座部の出家主義に連なっているものなのである」という批判を免れない。

『ミリンダパンハー』の即日出家説は他の部派、すなわち説一切有部の論書にも出ているが、即日涅槃説は『ミリンダパンハー』以外には見当たらない。

一方、法蔵部所伝とされる『四分律』にも、在家者の解脱について言及している。

如是耶輸伽族姓子。已學智學道。諸塵垢盡得法眼淨。彼作如是觀已有漏心得解脫。終不復習欲如本在俗時也。今耶輸伽族姓子。善獲大利。學智學道無漏心解脫。諸塵垢盡得法眼淨。(T22, p.790a)

このように耶輸伽族姓の子は、すでに智慧と道を学び、諸々の塵が尽き清らかな法の眼を得た。彼はこのように観を作り、すでに有漏の心は解脱を得、再び俗家にいたときのように愛欲を習うことは決してないであろう。いま、耶輸伽族姓の子は大きな利をよく獲得した。智慧と道を学び、無漏の心解脱[を得]、諸々の塵が尽き清らかな法の眼を得た。

この中で、『ミリンダパンハー』在家の特質の弱さに似ていると思われるのが、「すでに有漏の心は解脱を得、再び俗家にいたときのように愛欲を習うことは決してないであろう」ではないかと思われる。解脱を得て、その後再び、俗世の欲楽を享受するのはできないであろう。と、思うのが自然ではないのか。

上記の『四分律』の用例は、三帰依の後に説かれているもので、阿羅漢を語ることではない。阿羅漢ではない者も心の解脱を得ると再び俗世の欲楽を享受することができないのに、阿羅漢に達した者は言うまでもないであろう。

したがって、ナーガセーナの言った「在家の特質の弱さのために、阿羅漢性を獲得した在家者はその日において出家するか般涅槃する」ということは説得力がないと思う。これは、やはり在家に対して配慮しながらも、出家を中心とした思考が窺えると言っていいであろう。

5. 結論

仏教の歴史の中で、阿羅漢について様々な論議がなされた。そのなかで、もっとも重要なテーマが在家阿羅漢論である。これが問題になるのは、果たしてブッダは在家の阿羅漢を認めなかったのかに繋がるからである。もし、ブッダが在家の阿羅漢を否定したなら、在家の解脱はありえない。解脱あるいは悟りは出家者の専有になってしまう。なぜならば、さとりの普遍性が否定されるからである。

しかし、在家阿羅漢の可能性に関する問題を考察してみた結果、初期段階の文献の方が、部派時代に文献より、在家の解脱について肯定的で、ゆとりを持っていたと思われるし、それとともに、実際に、在家者の阿羅漢可能性については、どの部派も否定しなかったことがわかった。在家者の解脱、あるいは阿羅漢を全面的に否定しなかったの初期経典において認められていた、すべての人に開いていた悟りへの可能性を、部派仏教の当事者である出家者たちが遮断することは最初から不可能なことであったのではなかろか。したがって、上座部とか説一切有部の出家者たちは即日出家、即日涅槃という折衷案を提示したのではないかと推測する。

また、ブッダは在家の阿羅漢を決して否定したり、性を否定しなかったことを確認した。すなわち、在家の阿羅漢を認めなかったのは部派の出家者、その中で上座部あるいは説一切有部の立場に過ぎないことを意味することになる。


Footnotes

[1] 藤田宏達(1964:53)はこの部派について「その名の示すところによれば北インドに存在した部派と推定されるが、北伝の文献には全く知られていない部派で、大乗との関係も明らかではない。・・・この派は恐らく大衆部系の一派で、大乗仏教とも何らかの交渉を持っていたのではないかと考えられる」と述べている。

[2] AN.I, p.69 ; SN.V, p.410 ; T2, pp.247aなど。

[3] 藤田宏達(1964:51)

[4] 他の例としては、MN.I, p.493~4.もある。

[5] これはVipassana本を底本としている。PTS本は省略が多いので、内容把握のために、敢えてVipassana本を使うことにする。在家阿羅漢論はVipassan(pp.224~225)に出ている。

[6] PTS, Kv, p.267にはdukkhassantaṃ karotīti.である.

[7] MN I, p.483.

[8] Ibid. gihissa byañjanena로 되어 있다.

[9] Kvには在家の束縛の例として、家族や財産、性交などを挙げている。

[10] T2, p.489c. 汝今已出家 離於在家縛 云何離縛已 而復樂眠睡 若未斷愛欲 其心未解脫 未得最上智 不具斯事者 不名為出家

[11] 「外的な説話(Bāhirakathā)」はミリンダパンハーの古層に属し、「矛盾の問い」の部分は後に附加増広された部分とされる。藤田宏達(1964:56~57)参照。

[12] Mil, p.243. Gihī pi mahārāja, sammā paṭipanno ārādhako hoti ñāyaṃ dhammaṃ kusalaṃ, pabbajito pi mahārāja sammā paṭipanno ārādhako hoti ñāyaṃ dhammaṃ kusalaṃ.

[13] Mil. p.265. parittaṃ tiṇasalākaṃ upari garuke pāsāṇe ṭhapite dubbalatāya bhijjitvā patati.

[14] 『阿毘達磨大毘婆沙論』T27, 241a. 有說不得。彼要出家受餘法服得阿羅漢。有說彼在家得阿羅漢已。後必出家受餘法服。

[15] 藤田宏達(1964:60)、崔鐘男(2002:63)


References

1 . AN Aṅguttara-Nikāya, 5 Vols., PTS, 

2 . Kv Kathāvatthu, 2 Vols. PTS, 

3 . Milin Milindapañho, The Royal Asiatic Society, 1928., 

4 . MN Majjhima-Nikāya, 3 Vols., PTS., 

5 . SN Saṃyutta-Nikāya, 5 Vols., PTS., 

6 . T Taishō Shinshū Daizokyo, 55 Vols., 

7 . 藤田宏達(1964) 「在家阿羅漢論」『結城教授頌寿記念:仏教思想史論集』, 

8 . 崔鐘男(2002) 「在家者의깨달음」 『密教学報』 第四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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